방랑자의 옷은 낡고 헤졌으며, 그가 가려는 방향에 자리한 출입문은 막혀있다. 그가 이제 막 지나온 농촌의 집은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다. 허물어진 지붕, 현관문 앞에서 희롱하는 남녀, 집밖에서 소변을 보는 남자, 방랑자에게 으르렁거리는 적대적인 개... 중세 시골 마을의 생생한 풍광을 담은 이 그림은 귀족이나 부유한 이들의 집 거실에는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의 제목은 '방랑자(Wayfarer)', 이를 그린 화가는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생생한 이미지를 보여준 중세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David Bickerstaff의 다큐 'The Curious World of Hieronymus Bosch(2016)'는 화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 사후 500주년을 기념하는 고향 마을에서의 기념비적인 전시회를 담았다.

  3면화(Triptych, 성당 제단의 앞면을 장식하는 그림)는 보쉬의 주력 작품이었다. '쾌락의 정원(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은 에덴 동산, 속세, 지옥으로 이어진 3면화로, 특히 지옥편은 무시무시한 도상학적 상징들로 가득하다. 현대인의 눈에도 이 중세 화가가 그려낸 지옥의 이미지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새의 머리를 한 괴물은 사람을 삼키고 있는 중이며, 온갖 고문 기구와 변형된 신체가 그림 곳곳을 채운다. 도대체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는 어떤 사람일까?

  보쉬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부친은 화가였고, 집안은 대대로 신앙심이 깊었다. 화가는 자신이 평생 동안 살았던 고향 s-Hertogenbosch의 지명을 자신의 이름에 넣었다. 그곳의 대다수 주민은 상인들이었다. 몇 개의 수도원과 교회가 자리한 중세의 평범한 소도시에서 보쉬는 존경받는 화가이며 지역의 유지였다. 그는 그렇게 평탄한 삶을 살다가 60대 중반에 세상을 떴다. 보쉬의 명성은 사후에 더 커져갔다. 그가 창조해낸 놀라운 도상학적 이미지들은 후대의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현대 회화에 있어서 그 기괴하고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은 초현실주의와 긴밀한 접점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과연 보쉬는 그 기기묘묘하고 괴상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들을 온전히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일까? 다큐는 보쉬가 중세의 종교 서적과 문학 작품들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르네상스의 교양인으로서 보쉬는 그림 속에서 학문적 지식과 신앙을 조화롭게 구현할 방법을 찾았다. 보쉬가 그린 일련의 성인들에 대한 그림은 소박함 속에 은유적 상징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그가 그린 은수자(隱修者)들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그림을 통해 신에게 다가서고자 하는 보쉬의 삶이기도 했다. 그가 면밀하게 그려낸 지옥의 끔찍한 이미지들 또한 세상 사람들을 향한 신앙 교육의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이한 도상학적 그림에 후대의 사람들은 이 화가를 악마주의 신봉자와 약물 중독자로 여기기도 했다.

  이 다큐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보쉬의 그림이 중세 민중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한 점이다. 분명, 보쉬의 그림들은 당대 권력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 속에는 '방랑자'에서 볼 수 있듯 서민의 거칠고 고단한 삶의 풍광이 펼쳐진다. 보쉬의 그림은 성인과 천당, 속세와 지옥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안을 채우는 것은 보편적 중세인의 삶에 대한 관찰과 성찰이다. 후대 화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이 사실주의적 중세 풍속화를 그려냈다면, 보쉬는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종교화 속에 중세의 환상적 시공간을 펼쳐놓는다.

  보쉬가 만들어낸 도상학적 이미지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면에서 현대인은 그가 남긴 그림을 통해 5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중세의 문턱을 넘으려는 시간 여행자인지도 모른다. 이 여행이 주는 놀라움은 보쉬의 그림을 볼 때마다 새로운 궁금증이 일어난다는 데에 있다. 다큐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기이한 세계'는 비밀스러운 중세 화가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방랑자(Wayfarer)


아기 예수를 안은 성 크리스토퍼(Saint Christopher Carrying the Christ Child)


쾌락의 정원(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사후 추정 초상화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생애와 작품 세계(1909-199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rancis-bacon-1909-19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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