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도입부에는 도쿄의 시나가와(品川) 지역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온다. 도쿠가와 막부 시기, 시나가와는 에도의 유명한 홍등가였다. 그러던 곳이 1956년, 매춘금지법이 시행되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은 시간을 거슬러 1862년을 배경으로 한다. 쇼군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시나가와의 어느 유곽(遊廓), 사헤이지(프랭키 사카이 분) 일행은 게이샤들을 불러 진탕 퍼마시고 논다. 술값을 내지못한 사헤이지는 외상을 갚을 때까지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빌붙어 지낸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헤이지 말고 또 다른 외상 손님들이 진을 치고 있다. 타카스기(이시하라 유지로 분)와 동료 사무라이들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 그들은 왜 그곳에 모였을까...

  카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은 4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병이 있었다.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 우리가 루게릭병으로 알고 있는 병이다. 그는 버는 돈의 대부분을 술값과 유흥으로 탕진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사헤이지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감독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헤이지가 대책없이 외상으로 술을 마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헤이지는 겨울 동안 시나가와의 바다 공기를 마시며 요양차 눌러 앉을 심산이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에 걸렸지만, 사헤이지에게서는 결코 그늘진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놀라운 기지와 순발력, 유머 감각으로 사헤이지는 술집의 골치아픈 대소사를 해결해주며 환영받는 객식구가 된다.

  영화에서 술집 이곳저곳을 누비는 사헤이지의 민첩한 몸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병자가 맞나 싶다. 카와시마 유조는 사헤이지가 술집의 모든 공간에서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도록 만든다. 가진 것도 없고 몸도 아프지만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배포가 있다. 그러므로 타카스기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타카스기 일행은 영국 공사관을 폭파하려고 일을 꾸미는 중이다. 사헤이지는 그들로부터 막부의 스파이로 오인받는다. 타카스기가 칼을 들이대자 사헤이지는 한번 죽여보라, 고 맞선다. 평민 사헤이지는 그렇게 사무라이의 칼과 위세를 비웃는다.

  기막힌 민첩성과 친화력을 지닌 사헤이지와 대비되는 존재들은 타카스기와 그 일행 사무라이들이다. 타카스기는 그저 방구석에 누워 있거나 노래를 부르며, 동료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칼 뽑는 시늉을 할 뿐이다. 이 초슈번(長州藩)의 무사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존황양이(尊皇攘夷)를 부르짖으며 막부타도에 앞장선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 외국 공사관 폭파는 그들이 세운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1862년 12월 2일, 실제로 초슈번의 무사들은 시나가와에 있는 영국 공사관을 폭파시켰다. 영화 속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는 실존 인물이었다.

  카와시마 유조는 1950년대의 일본과 혼란기의 막부 말기를 기묘하게 대비시킨다.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던 타카스기(그는 메이지 유신을 앞두고 죽었다)와 같은 이들은 결국 메이지 유신을 이루어 내었다. 일본에서 미군정이 끝난 때는 1952년, 일본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흔적을 하루빨리 지우고 싶어했다. 패전 이후에 숨을 죽이고 있었던 보수 우익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변혁의 시대', 영화 속 사헤이지와 타카스기가 살았던 그 시절은 감독이 통과하는 동시대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지배 계급과 정치인들은 권력과 대의명분을 두고 싸우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민초들의 삶은 언제나 고단하고 괴로울 따름이다. 술집에 진 빚 때문에 매춘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게이샤는 몸값 치뤄주고 자신을 빼내어줄 남자를 기다린다. 도박꾼 남자는 딸을 술집에 팔아넘기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게이샤 하나를 두고 싸움을 벌인다. 신사(神社)의 축제에 온 저잣거리가 들썩인다. 영화 속 홍등가의 풍경은 애잔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낸다. 카와시마 유조는 영화로 막부 말기의 세밀한 풍속화를 그려내는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사헤이지는 게이샤로부터 골치아픈 손님을 따돌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게이샤가 죽었다며 손님을 묘지로 안내한 사헤이지는 속임수가 들통나자 도망을 친다. 묘지로부터 해안길로 이어지는 탁 트인 그 길을 사헤이지는 신나게 달려간다. 원래 카와시마 유조는 사헤이지가 묘지를 지나 현대의 시나가와를 통과하는 것으로 찍으려 했다. 하지만 주연 배우 프랭키 사카이를 비롯해 촬영 스태프 대부분이 반대하자 뜻을 접었다(출처: ja.wikipedia.org). 혼란과 분열의 시대로부터의 탈주.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후대의 관객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헤이지의 도피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을 감지한다. 아마도 격변기의 시대와 병고를 뛰어넘고자 했던 또 한 사람은 이 영화를 만든 카와시마 유조 감독, 그 자신일 것이다.  



*사진 출처: odyssey3.exblog.jp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女は二度生まれる, Women Are Born Twice)'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women-are-born-twice-19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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