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차가 한 대 다가온다. 남자의 오랜 친구 마렉이다. 그는 휴가를 보내러 이 외딴 시골 마을의 친구를 찾았다. 한때 촉망받는 물리학자로 함께 연구소에 있었던 그들은 이제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얀은 시골 기상 관측소 일을, 마렉은 하버드에서도 공부하고 아주 잘 나가는 학자가 되었다. 마렉은 재능있는 친구가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어떻게 5년 동안이나 살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그렇게 얀과 그의 아내 안나의 시골 마을 일상에 마렉이 들어온다.

  폴란드의 감독 Krzysztof Zanussi의 데뷔작 '수정의 구조(Struktura kryształu, 1969)'는 제목만 본다면 무슨 학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영화같다. 74분의 그리 길지 않은 러닝타임을 가진 이 흑백 영화는 의외로 매우 명쾌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마렉은 관찰자로서 친구 얀의 시골 생활을 들여다 본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어린 아이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지기, 팔씨름, 썰매 타기... 둘은 곧 떨어져 있었던 5년의 시간을 메꾸며 친밀감을 회복한다. 하지만 마렉이 보기에 얀의 삶은 지루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다.

  "넌 낭비하고 있어. 재능과 너 자신을."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마렉에게 얀과 안나 부부의 삶은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마렉은 부부 침실의 열려진 문으로 안나가 얀에게 베개를 던지며 장난을 거는 것을 본다. 이혼한 마렉에게 부부의 친밀한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소박하고 활달한 안나는 마렉과도 곧 친해진다. 그들 세 사람이 일상을 함께 하며 지내는 모습에서 프랑소와 트뤼포의 '쥴과 짐(Jules et Jim(1962)'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관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두 친구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 태도의 차이를 대비시킨다.

  미국에서 지내다 온 마렉은 얀에게 최신식 자동차와 멋진 여자 모델이 등장하는 잡지를 보여준다. 얀은 그것들을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지나가는 풍경처럼 보고 평을 한다. 얀은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자연을 벗삼아 지낸다. 별다른 욕심이 없는, 그 자체로 만족하는 삶. 마렉은 얀에게 재능을 발휘하며 성취하는 삶이 가치가 있지 않느냐고 떠본다. 그렇다. 그가 이 시골 마을에 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마렉이 일하는 연구소의 소장은 얀을 다시 불러서 함께 일하고자 한다. 마렉은 얀을 설득해 데려오는 역할을 맡았다.

  얀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에게는 도시의 아파트가 제공될 것이며 높은 급여를 받으며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얀은 그 제안을 거부한다. 마렉은 그런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마렉은 얀이 쓸모없는 램프 장난감을 만드는 걸 한심하게 여긴다. 얀이 술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다. 마렉의 눈에 비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죄다 무지렁이 시골 농부일 뿐이다. 뛰어난 머리를 가졌으면 그것을 활용해서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해야하고, 부와 명예를 쌓아야 마땅하다. 마렉은 그런 신념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얀은 마렉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가 아닌 다른 삶의 가치를 바라본다. 충만함, 평화, 자유, 사랑과 같은 것들...

  안나는 마렉에게 얀이 산에서 큰 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그것이 얀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마렉은 얀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실패한다. 영화 '수정의 구조'에서 마렉이 얀의 삶을 들여다 보는 일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영화를 보는 행위와도 닮아있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성찰하기(reflection)'. 물론 응시와 성찰만으로 삶에서 근원적인 변화를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마렉은 자신이 질주해온 설원의 길을 다시금 방향을 돌이켜 떠난다. 두 친구의 서로 다른 삶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지평선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의 지평을 응시하는 그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이켜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다. 크지스토프 자누시는 그렇게 자신의 소박한 데뷔작에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포개어 놓는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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