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만에 장편 극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1960년대 일본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 그것은 좀 버겁기는 했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카토 타이(加藤泰) 감독의 'Blood of Revenge(1965)'는 18일 동안의 촬영 결과물이었다. 감독과 주연 배우는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크게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의 원제목은 '明治侠客伝 三代目襲名', 우리말로 번역하면 '메이지 시대 협객전 삼대의 이야기'쯤 되겠다. 여기에서 '협객(侠客)'은 중국 무술 영화에서 볼 법한 그런 협객이 아니라 '야쿠자(ヤクザ)'를 뜻한다. 영화는 메이지 시대(1907년) 오사카를 배경으로 야쿠자 세력들의 암투를 그린다.

  TV의 등장은 영화 산업계에 커다란 숙제를 안겨주었다. 더이상 영화관은 관객들로 미어터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편안히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러한 상황은 1960년대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오랜 검열 제도가 막을 내리고, 폭력과 성을 과감하게 내세운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다. 일본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흐름은 야쿠자들이 등장하는 영화였고, 또 다른 흐름은 로망 포르노였다. 'Blood of Revenge(1965)'는 당시에 공장에서 찍어내듯 양산된 야쿠자 영화의 초기작이다.   

  영화는 인파로 붐비는 마츠리 행사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자객으로 보이는 한 남자는 멀리에서 누군가를 주시하고 있다. 키야타츠시 일가의 2대 수장 후쿠이치는 아내와 함께 축제를 구경하러 나왔다. 카토 타이는 바닥을 훑는 로우 앵글(low angle) 쇼트로 야쿠자 두목에게 닥친 불시의 습격을 보여준다. 오야붕의 치명적 부상에 조직은 동요한다. 후쿠이치에게는 유흥으로 시간을 보내는 철없는 아들 하루오가 있다. 복수를 하겠다며 혈기에 날뛰는 하루오를 진정시키는 이는 조직의 2인자 아사지로(츠루타 코지 분)이다. 적대하는 군지로 조직이 꾸민 일이라는 심증은 있다. 하지만 후쿠이치는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일가의 주력 사업인 건설업이 군지로 일파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후쿠이치가 죽는다. 미망인은 아들인 하루오 대신에 분별력 있는 아사지로를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이 영화에 묘사된 야쿠자 두목 후쿠이치는 일반인의 인식과는 다소 동떨어진 지점에 존재한다. 그는 자신에게 자객을 보낸 상대 일파에 대한 보복을 자제한다. 그의 조직이 주력하고 있는 사업이 '건설업'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조직에 의탁하고자 찾아온 손님 야쿠자 이시이는 '도박판'을 운영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후쿠이치는 자신의 조직에서 도박 사업은 금지되어 있음을 주지시킨다. 에도 시대 때부터 '도박장'은 전통적으로 야쿠자의 주된 수입원이었다. 영화는 키야타츠시 일가가 고베시 건설에 사업자로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야쿠자 조직은 도박이나 매춘으로 돈을 벌지 않는다. 아사지로와 부하들은 '시멘트' 조달에 목숨을 건다.

  이러한 야쿠자 일파에 대한 묘사는 매우 흥미롭다. 야쿠자는 흔히 폭력과 범죄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들이 일본 사회 내부에서 차지한 독특한 위치를 부각시킨다. 지배 계층은 필요에 따라 야쿠자를 써먹었으며, 그 결과 야쿠자들은 오랫동안 합법과 불법의 회색 지대에서 생존을 용인받을 수 있었다. 아사지로는 군지로 조직의 방해로 시멘트 공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자 그는 양해를 구하기 위해 건설 현장을 총괄하는 가장 큰 야쿠자 조직의 수장 노무라를 찾아간다. 노무라는 이 사업이 고베시의 근간을 만드는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다.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이제 그들은 범죄가 아닌 '사업'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조직의 내부 규범은 봉건 제도의 틀에 갇혀있다. 후쿠이치의 죽음 이후, 키야타츠시 일파는 후계자 문제로 분란에 휩싸인다. 오야붕의 미망인은 아들 하루오 대신에 아사지로를 지명한다. 일가의 미래는 혈족의 논리보다 뛰어난 리더의 능력에 달려있다. 다른 조직에서도 아사지로를 후계자로 인정한다. 하지만 아사지로는 후쿠이치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 자리를 거절한다. 하루오를 오야붕의 자리에 올리고, 그는 보좌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아사지로의 모습은 마치 주군의 아들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는 가신과 닮았다. 아사지로는 자신을 낮추며 고된 건설 현장을 책임진다.       

  아사지로에게서 그 어떤 인간적인 결점을 찾기는 어렵다. 그는 자신이 몸담은 조직에 충성하며, 상대 조직과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공존하고자 노력한다.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주는 또 다른 면모는 불운한 처지의 게이샤 하츠에(후지 준코 분)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와 사랑이다. 카토 타이 감독은 아사지로의 연정을 매우 비감하고도 아름다운 풍광 속에 담아낸다. 해질 무렵의 강둑에서 아사지로가 연인과 만나는 모습은 야쿠자가 아닌 평범한 한 남자의 내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가 발을 디딘 세계는 범부의 소박한 행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군지로 일파의 방해 공작은 극심해지며, 급기야 그들은 하루오를 공격해 큰 부상을 입힌다. 아사지로의 본성이 폭발한다. 그는 적들을 응징하러 갈 때 옷을 벗어 문신을 한 상체를 드러낸다. 그가 광포하게 휘두르며 내리꽂는 칼은 문신과 함께 아사지로의 본질적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입증한다. 키야타츠시 일가의 2인자로서 그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만, 한 여자의 남자로 살아가고 싶었던 그의 꿈은 부서진다. 아사지로는 연인 앞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간다.

  츠루타 코지(鶴田浩二)는 신의를 지닌 인간적 야쿠자 아사지로를 잘 연기해 낸다. 그는 현실의 야쿠자에게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협객'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그가 인기 절정에 있었을 때, 야쿠자 최대 조직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미움을 사서 테러를 당한 일은 기묘한 울림을 준다. 어떤 면에서 전성기 야쿠자 영화의 서사들은 실제 현실과 유리된 지점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환영(幻影)이었다. 그럼에도 'Blood of Revenge'는 야쿠자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메이지 시대에 합법적 사업으로 세력 확장을 모색하는 야쿠자들, 봉건적 주종 관계로 얽힌 조직의 위계 질서, 경쟁 관계에 놓인 일파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 감독 카토 타이는 열악한 제작 여건 속에서 만들어진 양산형 야쿠자 영화에 그렇게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진 출처: eduardo.exblog.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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