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 릴리언 헬먼(Lillian Hellman)은 매카시즘의 광풍에 굴복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헬먼이 시나리오를 쓴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Dead End(1937)'에는 하나의 도로를 공유하는 부자와 빈자가 나온다. 이 극명한 계층 대립의 구조는 헬먼이 바라본 미국 사회의 내면이었다. 아서 펜 감독의 1966년작 'The Chase'에 이르면 헬먼의 그러한 시각은 더 날카로워진다. 인종 차별, 부패와 폭력, 성적 타락... 헬먼은 텍사스 가상의 소도시 Tarl County에 그 모든 것을 구현해낸다. 명백히, 그 도시는 철저히 썩은 미국 사회의 축소판임이 드러난다.

  부유한 은행가 발 로저스는 Tarl County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자이다. 마을의 보안관 칼더(말론 브랜도 분)는 상식과 공정성을 지닌 인물이지만, 그 또한 마을의 다른 사람들처럼 로저스의 영향력 아래 있다.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냈던 버바(로버트 레드포드 분)의 탈옥 소식이 들린다. 도주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살인 사건에 휘말린 버바. 칼더는 그가 마을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 로저스의 집에서는 부자들의 호화로운 생일 파티가 열린다. 그곳에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부행장 에드윈의 집에서 그들만의 파티를 즐긴다. 버바의 탈옥 소식에 마을은 긴장과 흥분에 휩싸인다. 자경단이 버바를 잡겠다고 난리를 치는 가운데, 마침내 버바가 마을에 숨어드는데...

  Rotten to the core. 영화 속 Tarl County의 사람들을 묘사하는 말로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듯 하다. 버바의 아내 안나(제인 폰다 분)는 로저스의 아들 제이크와 불륜 관계이다. 부행장 에드윈의 아내 에밀리는 유부남과 바람이 났다. 에드윈의 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은 이 마을의 성적인 타락과 방종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칼더로 대변되는 공권력도 무시한다. 젊은 여자는 지나가는 흑인을 보고 탈주범이라고 외치고, 남자들은 린치를 하려고 한다. 칼더는 그들로부터 흑인을 안전하게 떼어놓기 위해 구치소에 가둔다. 그러자 자경단원들은 떼로 몰려가서 칼더를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보안관 칼더는 자신이 온전히 관할하는 영역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하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그의 모습은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받는 경멸을 입증한다. 리브스 부인은 아들을 잡지 말라며 돈다발을 들고 칼더를 찾아가기까지 한다. 칼더가 거절하자 부인은 반문한다. '돈이 충분하지 않은 거야?' 칼더는 로저스의 하수인으로 취급받으며, 돈으로 매수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 썩어빠진 마을에서 그나마 온전한 양심을 지닌 이는 칼더이다. 그는 마을의 모든 것에 역겨움을 느끼고 떠나고 싶어한다. 입양을 하자는 아내의 말에, 칼더는 이런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 마을은 결코 한 인간이 온전히 성장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헬먼은 미국의 부패하고 타락한 내면을 영화 속 Tarl County에 투영한다. 칼더가 대변하는 공권력은 로저스가 가진 돈의 힘에 조롱당하고 제압된다. 구치소에 갇힌 흑인은 린치를 당하며, 칼더의 부인이 마을 사람에게 요청하는 도움은 묵살된다. 그곳 사람들의 영혼은 철저히 썩었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은 버바가 숨은 폐차장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불꽃놀이를 하듯 즐거워 한다. 젊은이들은 춤추며 노래를 부른다. 무언가 대단한 구경거리를 기대하며 술꾼들은 자리를 지킨다.

  이 미쳐 돌아가는 마을에서 죄가 없는 버바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불가피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영화 'The Chase'의 세계는 너무나도 암울하다. 헬먼은 미국 사회가 분열과 갈등에 휩싸여 있음을 직시한다. 계층의 대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을 젊은이들의 무절제와 향락은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의 타락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벌어져 있다. 버바는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를 냉담하게 외면한다. 로저스는 술에 빠져 지내는 아들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다. 린치를 당하는 흑인은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에 대한 단면을 제공한다. 어떤 면에서 Tarl County는 다양한 집단의 정치적 목소리와 인권 운동으로 끓어오르던 1960년대 미국 사회 그 자체인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칼더는 아내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칼더의 모습은 구약 성서의 인물 롯을 연상케 한다. 구약 성서 속 죄악의 도시였던 소돔(Sodom)은 신의 징벌을 받아 파괴된다. 그곳의 유일한 의인 롯은 불바다로 변한 소돔을 뒤로 하고 필사적으로 빠져 나온다. 버바가 죽는 것을 목도해야 했던 칼더는 패배자로 그곳을 떠난다. 헬먼은 양심과 윤리가 무너져 내린 미국의 황폐한 내면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감독 아서 펜은 제작자 샘 스피겔과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편집권을 뺏겼다.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고, 이듬해 아서 펜은 'Bonnie and Clyde(1967)'로 자신의 진정한 걸작을 만들어 냈다. 그의 영화적 인장(印章)이 흐릿한 'The Chase'에서 결국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공산주의자 헬먼의 강건한 목소리이다. 헬먼은 미국의 내면을 뼛 속 깊이 파내려 가며, 그 비참한 풍경을 영화 속에 구현한다.


*사진 출처: tcm.com



**릴리언 헬먼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Dead End(193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dead-end-19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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