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학교 마치면 어디 딴 데 가 있고 싶어. 이 영화판 사람들 정상인 사람들 아무도 없어. 다 또라이야."

  이제 막 자신의 영화를 찍은 대학원생 문수(이선균 분)는 전 여자친구 선희(정유미 분)에게 그렇게 말한다. 홍상수의 2013년작 '우리 선희'에는 문수가 말한 그 '또라이' 천지인 영화판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맞아, 거긴 또라이들이 가득했어. 결국 그래서 '어디 딴 데'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과 학생 선희는 한동안 학교를 떠나 있었다. 그러다 유학을 앞두고 추천서를 받기 위해 최교수(김상중 분)를 찾는다. 헤어진 남자 친구 문수, 가깝게 지냈던 선배 재학(정재영 분)은 다시 보게 된 선희가 너무나도 반갑다. 그들 모두는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세 남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선희에 대한 마음을 토로한다. 문수는 선희의 마음을 다시 얻고 싶어하고, 재학은 숨겨왔던 연심을 내비치고, 최교수 또한 제자가 아닌 여자로 선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언제나 그러하듯 홍상수의 '소주'가 함께 한다. 

  절친한 사이인 세 남자는 한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 여자가 '선희'라는 사실은 서로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희는 세 남자에게 각각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확실히 문수와는 끝났고, 최교수에 대해서는 모호하며, 재학에 대해서는 진심인 것처럼 보인다. 이 사각 관계의 오묘한 퍼즐을 풀 수 있는 단서는 오로지 '소주'에 있다. 술이 들어가고 나서야 그들은 본심을 말하고, 솔직해지며,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에 근접한다. '소주'는 홍의 영화적 각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게 영화쪽 사람들에게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술과 담배는 인간 관계, 영화 작업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에서 계속 변주해서 보여주는 영화계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신랄하고 풍자로 가득 차 있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우리 선희'는 로맨스 영화라기보다는, 그가 가장 잘 아는 영화판,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기 돈 들여 영화를 찍어서 어쨌든 감독 '입봉'을 한 문수, 선희에게 '감독님'으로 불리지만 써지지 않는 차기작 시나리오 붙잡고 씨름하는 재학, '교수' 직함 달고 지루하지만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진입한 최교수. 그들은 서로에게 모두 과거, 현재, 미래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 세 명의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마주친 곤경은 '선희'가 아니다. 생의 활력 내지는 창의력의 고갈이다.

  관객은 세 남자가 바라보는 선희에 대한 평가가 모두 같은 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최교수의 추천서에서부터 시작된 이 언어의 여정은 세 남자가 창경궁에서 우연히 모이게 되는 자리에서 정점을 이루며 끝난다. 내성적이지만, 똑똑하고, 안목이 있으며, 때론 또라이 같지만, 용감하다. 마치 감염이 되듯 그들은 술자리에서 서로 나눈 대화들을 머릿속에 '입력(input)'해 두었다가, 다른 사람과의 술자리에서 '인출(output)'한다. 이건 선희에 대한 평가뿐만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닌 개똥철학과 같은 신념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문수가 투정처럼 영화판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자, 선희는 한 우물 파듯 끝까지 해봐야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다고 젠체하며 충고한다. 그런데 그건 선희가 문수를 만나기 직전에 추천서 문제로 만난 최교수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문수는 선희에게 들었던 그 말을 선배 재학과의 술자리에서 열정적으로 강변한다. 재학은 나중에 선희와의 술자리에서 그 '한 우물' 타령을 앵무새처럼 읊조린다. 이 우스꽝스러운 언어의 유랑을 보는 일은 허허로우면서도 통렬하다.

  그렇게 홍상수는 '영화판'이라는 비좁은 생태계의 폐쇄성을 선희와 세 남자의 관계를 통해 드러낸다. 그의 이러한 묘사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적확하며 사실적이다. '선희'는 세 남자에게 '연인'이라기보다는 정체된 삶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줄 영감(靈感), 뮤즈(Muse)로 여겨진다. 최교수는 선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마음의 울렁거림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재학에게 토로한다(그는 선희의 존재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차기작은 언제 할지도 모르는 재학에게 선희는 신선한 열정의 통풍구이다. 문수는 또 어떤가. 돈 천만 원 들여 찍은 영화는 관객이 거의 들지도 않은 영화이다. 선희는 그 영화가 둘의 연애 관계를 그대로 베껴서 써먹었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문수가 선희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것은 바닥난 창작력에 물을 붓고 싶어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우리 선희'는 예술이라는 그럴듯한 허명(虛名)에 얽매인 인간군상들의 적나라하고도 서글픈 초상을 보여준다. 나는 영화 내내 계속 웃었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는 가슴 한켠이 꽤나 쓰라렸다. 문수, 재학, 최교수, 선희...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은 한 번쯤 만났을 법한 인물들이고, 그들의 술자리와 대화는 나에게 결코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반복해서 쓰는 말이 있다. 시간 되면 전화할게, 꼭 보고 싶었어, 너 예뻐(이건 남자들이 선희에게만 하는 건 아니다. 선희도 재학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예쁘다고 말한다). 모두다 거짓부렁이야... 아름답게 빛나는 예술은 저 멀리에 있고, 삶은 구질구질하며, 인생은 짧다. '우리 선희'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 예술의 진창길에서 몸부림친다. 나는 홍상수가 보여준 이 처절한 자기 성찰에 진심으로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싶어졌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들 리뷰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on-beach-at-night-alone-2017.html


도망친 여자(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woman-who-ran-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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