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과도 같은 순간,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2021)'


What Do We See When We Look at the Sky?(2021)

조지아어 표기 제목 რას ვხედავთ როდესაც ცას ვუყურებთ?

Alexandre Koberidze, 러닝타임 2시간 30분



  영화는 하교하는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시끌벅적하던 교문 앞은 어느새 텅 비어있다. 참새 한 마리가 잠깐 땅에 내려앉았다가 사람의 발소리에 놀라서 날아간다. 남자와 여자의 다리 부분만 보이는 쇼트에서 두 사람은 서로 부딪힌다. 여자가 떨어뜨린 책을 남자가 주워서 건네준다. 의대생 리사와 축구 선수 게오르기는 그렇게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아, 여기까지만 보면 로맨스 영화겠군,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좀 특이하다. 리사가 늘 다니던 건널목의 나무, 감시 카메라, 빗물받이, 바람은 리사에게 닥칠 악운을 걱정한다. 그들은 리사에게 그것을 경고하고 싶지만 전할 방법이 없다. 다음날 아침, 리사와 게오르기는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눈을 뜬다. 외모 뿐만이 아니라 이전에 그들이 가졌던 재능마저도 사라진다. 관객은 곧 그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목소리를 듣는다. 영화 'What Do We See When We Look at the Sky?(2021)'에서 감독 Alexandre Koberidze는 바로 그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를 맡았다.

  밤거리의 카페에서 젊은이들은 즐겁게 담소하며 술잔을 부딪힌다. 그 시각, 리사와 게오르기는 약속한 장소인 카페에 가지만 이미 마법에 걸려 외모가 바뀐 그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약국에서 일하던 리사는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카페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축구부에서 쫓겨난 게오르기는 길거리 공연으로 카페에 손님을 유인하는 일감을 얻는다. 가까운 장소에서 일하는 리사와 게오르기 사이에는 여전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 대체 뭘 이야기하려는 걸까? 영화는 두 주인공의 운명에 무심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도시의 사람들과 풍경에 더 오래 머문다. 사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조지아의 유서깊은 도시 Kutaisi이다.

  햇살이 쏟아지는 맑은 날씨에, 사람들은 느긋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다. 도시의 일부분처럼 보이는 개들은 늘 어슬렁거리며 다닌다. 클래식과 전자음으로 조화롭게 구성된 음악은 그러한 풍경에 운율을 부여한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그런 가운데에 리사와 게오르기의 운명을 바꿀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는 감독과 제작진이 쿠타이시에 온다.

  "이 바보들은 까마귀 Guia A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대들도 까마귀의 얼굴에서 그 무엇도 알아낼 수 없다."
  (These morons have never seen a raven Guia A. thought, but you couldn't notice anything on his face.)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도입부의 이 문장은 조지아의 작가 Reso Cheishvili의 'Guia. A'에서 따왔다.

  "나는 쿠타이시의 시장에서 허브를 팔고 있는 지오콘다를 보았다."
  (Once I saw Gioconda on the market of Kutaisi, she was selling herbs) - Levan Chelidze, 'A story forgotten by all'

  아이들이 신나게 축구 연습을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가운데 허공을 향해 날아간 공이 강물에 떨어진다. 그렇게 2부가 시작되면서 나오는 글귀도 선문답 같기는 마찬가지. 도시 전체가 월드컵의 열기에 휩싸이고, 감독의 내레이션은 자장가처럼 계속 이어진다. 이쯤되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지루함에 나가떨어질 법도 하다. 그는 도시를 배회하는 몇몇 개들의 성격까지 알려준다. 로맨스 영화의 외피를 둘렀지만 그 안을 채우는 건 쿠타이시의 시민들과 풍광이다. 학교에서 땡땡이치고 도망치는 아이들, 밤늦게 거리에서 축구경기를 보느라 열광하는 시민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닫혀있는 대문, 흘러가는 강물... 그러니까 이 영화는 쿠타이시에 바치는 감독의 영상서사시인 셈이다.

  주인공이 있고, 사건이 벌어지며, 그것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플롯으로 구성된 전통 서사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2시간 반짜리 수면제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낯선 나라 조지아의 감독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너무나 많은 일들,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 현대인들에게 '성찰'은 쓰기 싫어 미뤄두다 포기한 일기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느리고 소박한 도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새삼 자신과 그 주변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이제 선문답처럼 여겨진 영화 속 문장이 이해될 것도 같다. 때론 까마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고, 시장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얼굴에서 삶을 유추하는 일 같은 사소한 순간들이 우리의 삶에는 필요하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그렇게 평화로운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마법과도 같은 순간.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50초 분량의 무성 영화 '열차의 도착'을 상영했을 때, 그것을 본 관객들이 느낀 감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독 알렉산드르 코베르제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영화적 마법을 선사한다. 도시를 대표하는 연인들 역에 캐스팅된 리사와 게오르기는 나중에 시사회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촬영된 필름 속의 두 사람은 그들이 처음 만날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리사와 게오르기가 마법에 걸린 것, 그래서 변신을 하고 기억을 잃는 일, 결국 다시 사랑에 빠지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결말. 감독이 내레이션에서 말했듯 그 모든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때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건 신비이며, 아름다움이다. 창작자는 무의미하고 쓸데 없어보이는 현실의 순간을 절개해서 그 틈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빛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영화에는 그런 빛들로 가득 차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조지아 출신의 영화 감독 작품들 리뷰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영화, 달의 연인들(Les Favoris de la lune, 198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les-favoris-de-la-lune-favorites-of.html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유작, Ashik Kerib(198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ashik-kerib1988-power-of-dog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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