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영화의 눈부신 전성기, 호주 뉴 웨이브(Australian New Wave) 영화들 2부

호주인의 정체성과 자연:
Sunday Too Far Away(1975), Ken Hannam
The Last Wave(1977), Peter Weir

 


1. 노동과 삶의 현장으로서의 자연, Sunday Too Far Away(1975)

  South Australian Film Corporation(SAFC). 우리말로 번역하면 '남호주 영화 협회'이다. 1972년에 설립된 이 단체는 호주 뉴 웨이브 영화의 산파와 버팀목 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 이전까지 호주 영화 산업은 고사 상태에 있었다. 호주 대륙의 풍광은 해외 제작자들에게 로케이션 장소로 눈길을 끌었다. 호주 영화 산업은 일종의 하청 역할을 떠맡았고, 제작으로 생긴 수익금은 제작사 본국이 가져가는 구조였다. 그런 상황에서 호주 정부는 영화를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지원을 해나갔다. 영화 학교를 설립해서 제작 인력을 양성했고, 국가 주도로 제작사를 만들어서 기금을 조성했다. SAFC는 그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영화들 또한 그 SAFC의 제작비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상업 영화 발전을 정부가 주도한다는 점에서 호주 뉴 웨이브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자, 이제 여러분이 SAFC의 고위 책임자라면 어떤 영화의 제작을 돕겠는가? 당연히 호주라는 국가, 호주인의 정체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영화 제작에 마음이 기울 것이다. Ken Hannam 감독의 1975년작 영화 'Sunday Too Far Away'는 그러한 취지와 정확히 부합했다. 이 영화는 SAFC의 첫 제작 작품이었다. 영화는 1956년에 일어난 호주 양털 깎기 업자(sheep shearer)들의 파업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근대 호주 양모 산업의 주축을 이루었던 그들은 열악한 노동 여건에서 저임금에 시달렸다. 잘 알려진 1891년의 파업 이후로도 shearer들의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영화는 '폴리'라는 양털 깎기 일꾼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광대한 호주 평원을 배경으로 근육질의 사내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아주 간명하게도 양털 깎기 노동자들의 세계에서 '짱'은 제일 빨리, 많이 양털을 깎는 사람이다. 주인공 폴리는 어쩌다 흘러들어간 농장에서 호적수 아서를 만난다. 영화의 내용은 그 둘의 '양털 깎기 승부'와 농장주의 임금 횡포에 맞서는 파업이 주를 이룬다. 러닝타임 94분의 이 영화는 정말이지 너무 싱겁게 끝나버려서 '아니, 저게 전부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는 폴리의 로맨스와 관련된 부분이 들어갔으나, SAFC의 입김으로 상당 부분 편집되어서 상영되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꽤 큰 흥행 수익을 냈다. 당시 호주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호주인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영화였을 것이다.

  'Sunday Too Far Away'에 내포된 정서는 결국 본질적인 질문과 연결된다. '호주인은 누구인가? 호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양털 깎기 노동자들의 거칠고 남성적인 세계는 양떼와 초원으로 상징되는 호주 자연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호주 뉴 웨이브 영화들에서 그러한 호주 자연의 풍광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목도하게 된다. 호주인들에게 대륙의 자연은 자신들의 근원과도 같다. 그것이야말로 다른 영연방 국가들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자연 풍광이 수려한 뉴질랜드는 호주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


2. 원주민에 대한 백인 이주민의 부채의식, The Last Wave(1977)

  1988년에 KBS에서 방영된 외화 '가시나무새(The Thorn Birds, 1983)'를 시청했던 독자들이라면 주인공 랄프 신부 역의 Richard Chamberlain을 기억할 것이다. Peter Weir 감독의 1977년작 'The Last Wave'에는 아주 젊은 시절의 체임벌린이 나온다. 이 영화는 그가 외모 뿐만 아니라 연기 역량도 뛰어난 배우라는 점을 입증한다. 영화의 도입부, 운동장에서 놀던 시골 초등학교 아이들이 갑작스런 소나기를 피해 교실로 들어온다. 그런데 이 비는 그냥 잠깐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주먹만한 우박과 함께 무시무시한 파괴력으로 건물을 강타한다. 우박에 깨진 유리창 파편은 아이의 목에 피가 철철 흐르게 만든다. 인간의 세계를 압도하는 자연의 힘, 'The Last Wave'에서 자연은 찬미의 대상이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야기한다.

  기업 세무 담당 변호사 데이비드는 법률 지원 제도에 의해 배정된 사건 하나를 맡게 된다. 원주민 4명은 동료 원주민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당했다. 원주민들이 살인 혐의를 부인하는 가운데, 사건을 맡은 후 데이비드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생긴다. 원주민이 나오는 꿈을 꾸고 불안 증세에 시달리던 그는 꿈에서 본 남자가 기소된 크리스(David Gulpilil 분)임을 알아차린다. 이 기이한 우연의 일치를 파고들면서 그는 살인 사건이 원주민들의 주술에 의한 것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는 동안 시드니에는 이례적 폭우가 이어지고, 데이비드는 그 비에서 임박한 재앙의 기운을 느낀다. 도대체 데이비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The Last Wave'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물'이다. 학교 교실에 내리 꽂히던 우박처럼 도시에 쏟아지는 폭우는 불길한 저주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틈입하며 스며드는 이 공포스러운 물은 데이비드 가족의 단란한 저녁 식사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식사를 하다 말고 이상한 느낌에 거실로 나온 그는 2층 계단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을 본다. 물은 욕조에서 넘쳐 흐르고 있었다. 수도를 잠그는 것으로 저녁의 중단된 일상은 복구된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이후 느끼게 된 불안과 두려움은 그렇게 잠글 수 없다. 관객은 그가 현실과 합리성의 영역에서 강력한 초자연과 주술의 영역으로 빨려들고 있음을 본다. 

  결국 그가 자신을 괴롭히는 알 수 없는 공포의 실체와 마주하기 위해 가는 곳은 거대 도시 시드니의 지하 하수도이다. 잘 정비된 하수 시스템의 숨겨진 영역에 원주민들의 비밀 성소(聖所)가 있다. 마치 버려진 마야 원주민의 유적지처럼 허물어진 돌 무더기와 고대 벽화들, 기괴한 석상(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과 비슷하다)들 가운데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과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발견한다. 그 장면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에 속하는 데이비드가 원주민 주술사의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지하에서 빠져나온 그가 해변가에 서있다. 그곳에서 그는 대지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파도를 본다. 그것이 실재의 파도인지, 상상의 환영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 'The Last Wave'는 호주라는 국가의 탄생에 자리한 원죄와 부채의식을 부각시킨다. 원주민과 자연은 백인 이주민들에게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그림자이다. 백인의 외양을 하고 있으되, 영적으로는 그 땅의 초자연적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존재. 영화 속 데이비드는 자신과 닮은 가면을 지하에 두고 도망쳐 나온다. 낯설고 두렵기 때문에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이 디디고 서있는 땅의 모든 것은 이미 뿌리처럼 무의식을 파고 들며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피터 위어는 호주인의 내적 심연을 들여다 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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