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배우다, Pig(2021) 

  니콜라스 케이지. 몇 년 동안 그 배우의 이름을 내가 본 곳은 헐리우드 가십란이었다. 시끌벅적한 이혼과 재혼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나는 케이지가 아직까지 배우로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1995)'가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영화였다. 그러다 2021년작 영화 'Pig'에서 케이지를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었다.
   
  포틀랜드의 숲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롭(니콜라스 케이지 분)은 송로버섯을 채취하며 살아간다. 롭에게는 버섯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는 돼지 한 마리가 있다. 그저 돼지에게 가끔 말을 건넬 뿐이지만, 롭에게 돼지는 사업 파트너이면서 친구 같은 존재이다. 아미르는 그런 롭에게 가끔 들러 버섯을 매입해 가는 유일한 방문자이다. 어느 날 저녁, 롭의 오두막에 침입자들이 들이닥친다. 부상을 입은 채 깨어난 롭은 돼지가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이대로 녀석을 잃을 수는 없어! 롭은 아미르의 도움을 받아 돼지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데...

  영화 속 롭의 모습은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출연자를 연상케 한다. 노숙자 같은 외모에 장발의 머리와 수염, 사람들과의 교류를 단절한 채 오로지 돼지 한 마리와 함께 살아가는 그는 속세를 등진 사람임이 틀림없다. 어쩌다가, 왜 그는 그런 삶의 방식을 택했을까? 관객은 그의 여정을 통해 롭의 지난 인생 역정을 하나씩 알게 된다. 그는 과거 아주 잘 나가는 셰프였으나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 그에게 잃어버린 돼지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부서진 삶을 견디게 해주는 작지만 소중한 조각이었다.

  'Pig'는 돼지를 찾아나선 롭의 여정을 통해 상실의 고통과 마주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롭이 회피와 은둔의 방식을 택했다면, 아미르의 부친 다리우스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상실에 맞선다. 그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아내를 외면하고 부인한다. 그리고 그는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위해 물질적 욕망을 향해 내달린다. 롭이 돼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다리우스를 설득하는 방식은 진심이 담긴 '요리'이다.

  영화는 꽤나 진지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 속은 텅 비어있다. 도시의 지하 세계에서 롭이 맞닥뜨리는 내기 격투 장면,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장삿속으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를 질책하는 장면 같은 것들도 그다지 감정적 울림을 주지 못한다. 이 영화를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딸을 구하기 위해 무자비한 복수의 여정에 나선 리암 니슨의 '테이큰(Taken, 2008)'과 완고하고 냉담한 이들을 요리로 감화시키는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 1987)'의 합본이다. 롭이 구하려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돼지'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부박하고 공허해 보이는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이다. 그의 존재감은 영화를 압도하며, 관객을 무작정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케이지를 주연으로 쓸 수 있었던 신인 감독 마이클 사르노스키(Michael Sarnoski)에게는 결정적인 행운이었던 셈이다. "나는 배우다!" 'Pig'에서 관객은 오랫동안 그 존재감을 잊고 있었던 한 배우의 포효를 듣는다.


2. 소박하지만 빛나는 영화적 시원성(始原性), Pebbles(Koozhangal, 2021) 

  영화가 시작되면 잔뜩 성이 난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학교 교실에 들이닥친다. 겁에 질린 아이가 끌려나온다. 이 남자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다. 아내는 그가 휘두르는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남자는 아들을 앞세우고 아내의 친정 마을로 가볼 참이다. '자갈(Pebbles)'이란 제목의 이 영화는 인도의 P. S. Vinothraj 감독이 2021년에 선보인 영화이다. 일반적으로 '인도 영화'하면 흔히 떠올리는 화려한 춤과 노래는 나오지 않는다. 건조하고 황량한 풍경 속에 아버지와 아들의 고통스런 여정이 펼쳐진다.

  'Pebbles'의 내러티브를 꽉 채우는 것은 이미지와 정서이다. 표면적으로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길에서 만나는 가난한 이들의 삶의 단면을 주의깊게 포착한다. 버스에서 우는 아기를 안고 아무런 표지판도 없는 허허벌판에 내린 젊은 엄마의 표정에는 무거운 고단함이 베어져 나온다. 먹을 것이 없어서 흙먼지 날리는 평원에서 들쥐를 잡아 구워먹는 할머니와 손녀딸의 모습도 보인다. 가난의 고통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소녀는 날개가 달린 씨앗들을 주워서 허공에 날려보내며 즐거워 한다. 그 씨앗들은 느리게 흩어지며 반짝이는 보석처럼 화면을 채운다. 그렇게 비노트라지 감독이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 인도 내륙 지역의 시골 풍경은 아름다움과 가슴저린 아픔이 공존한다.

  영화는 구조적인 빈곤, 폭압적인 가부장제의 어두운 일면을 주정뱅이 아버지와 학대받는 아들의 여정 속에 시적인 방식으로 포개어 놓는다. 아이는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을 그저 묵묵히 감당해낼 뿐이다. 아내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남자는 제 성질을 못이기고 버스표를 찢어서 폭염의 날씨에 아이를 걷게 만든다. 살을 태우는 듯한 더위와,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을 잊기 위해 아이는 바짝 마른 입에 자갈을 넣는다. 작은 돌멩이를 굴리는 동안 입안에는 침이 고이고, 다시금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깨어진 거울 조각을 주워 햇빛에 반사되는 빛으로 주변 절벽과 아버지의 등 뒤에 비추는 장난을 하기도 한다.

  관객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 집 나간 여성의 존재를 기억해야만 한다. 현실 속 소년의 엄마와 같은 처지의 많은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남편의 폭력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영화는 인도를 비롯해 제 3세계 빈곤 국가의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명백히 각인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깨끗한 우물이 없는 곳에서 흙탕물을 긷는 여인네들이 쪼그리고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이 가슴먹먹한 가난과 고통의 시적 서사는 비노트라지 감독 자신의 삶에서 건져낸 것이다.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아동 노동자로 일해야 했던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영화에 대한 매혹은 그가 DVD 대여점 직원으로 일할 때 시작되었다. 아마도 그 시절을 통해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습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Pebbles'에는 영화가 지닌 소박한 시원성(始原性)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미지, 그리고 그것으로 촉발되는 인간 내면의 근원적 정서.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탄생한 기원이며 중요한 뼈대를 이룬다. 'Pebbles'는 창작자의 내면에 고인 영화에 대한 열정이 지역색과 자본의 한계를 뛰어넘어 어떻게 세계의 다국적 관객에게 호소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screensl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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