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명, 대륙 횡단 철도의 개통

5편 The Grandest Enterprise Under God (1868–1874)   1시간 24분


 
  전쟁터의 총성과 화염은 이제 사라졌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본격적인 재건에 돌입한다. 'The Great Pacific Railway', 광대한 미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1862년, 링컨은 'Pacific Railroad Act'를 승인한다. 엄청난 공사비와 인력이 투입될 이 사업의 주체로는 두 개의 회사가 선정되었다. 센트럴 퍼시픽 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와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 Road)가 그 주역들이었다.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시작되는 센트럴 퍼시픽 철도와 동부의 유니언 퍼시픽 철도를 잇는 공사였다. 그렇게 동과 서에서 두 회사는 철로를 놓기 시작했다. 양쪽의 선로가 만나는 때가 미국의 동서 횡단 철도가 개통되는 날이 될 터였다.

  철도의 필요성은 이전부터 존재했다. 뉴멕시코의 보스케 레돈도 보호구역(Bosque Redondo Indian Reservation)에 미 정부는 정기적으로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 거칠고 황량한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은 외부의 식량 조달에 의존해야했다. 텍사스의 소떼들을 이동시키는 'Goodnight-Loving Trail'은 그 대표적인 통로였다. 전쟁이 끝난 후 북부의 쇠고기 수요가 증대했고,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운송 수단이 필요했다. 연방 정부는 두 철도 회사에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서 공사를 하도록 했다. 

  선로 공사를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아일랜드, 멕시코, 독일, 영국, 전직 군인과 해방 노예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사 구간 곳곳에서 그들이 받는 임금을 노린 매춘부, 포주, 도박장 운영자, 총잡이, 술집이 흥청거렸다. 그렇게 갑자기 많은 인구가 유입되자 남부 대평원(Great Plains)의 인디언들은 철도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백인들의 버팔로 사냥으로 버팔로들이 씨가 말라가는 판국에 인디언들의 생존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니언 철도 회사는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서부의 센트럴 철도 회사의 공사도 순탄치 않았다. 자연이 인간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거대한 산과 절벽, 거친 강이 공사의 장애물이었다. 특히 돌산을 폭파하는 것이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 일을 위해 고용된 이들은 중국인 노동자였다. 비록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체구는 작았지만, 중국인들은 성실함과 끈기로 그 작업을 해냈다. 바구니에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밧줄로 연결된 절벽을 오르내리며 돌산을 부수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약 600명의 중국인들이 죽었다. 초기 중국인 이민자들은 그런 희생을 감수하며 정착했다. 1869년 5월, 드디어 동과 서에서 시작된 철로가 하나로 만났다.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된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철도가 악귀처럼 여겨졌던 것처럼, 몰몬교도들에게도 그것은 재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에게는 안온한 사막의 성전 도시 솔트 레이크 시티에 이민자들이 철도를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민자들은 몰몬교의 일부다처제를 악습으로 보고 개탄했다. 1870년, 몰몬교도들은 자신들의 교리 수호를 위한 '분노 집회(Indignation Meeting)'를 개최한다. 몰몬교도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며, 그러므로 일부다처제는 당연한 것이라고 외쳤다. 그런 가운데 여성 몰몬교도들 사이에서는 투표권 쟁취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에 브리검 영은 미국에서는 최초로 유타주의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했다. 어떻게 그곳에서 일부다처제와 여성 인권 운동이 양립할 수 있었을까? 미국의 여성 투표권 운동가(Suffragette)들은 여성 몰몬교도들의 투표권 쟁취에도 불구하고, 몰몬교 여성을 자신들의 테두리에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철도의 개통으로 새롭게 부상한 도시는 캔자스 Dodge City였다. 그곳은 버팔로 사냥의 중심지였다. 50만 명의 이주민들이 캔자스에 정착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버팔로는 '걸어다니는 황금'으로 여겨졌다. 거대한 열풍이 불었다. 모두들 총을 들고 평원의 버팔로를 닥치는 대로 잡았다. 버팔로는 버릴 것이 없었다. 쇠고기는 식량으로, 뼈는 비료 회사가 가져갔다. 3백만 마리의 버팔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철도가 개통된지 2년만의 일이었다. 1874년, 미 의회는 버팔로 사냥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그랜트 대통령은 거부했다. 남부에서는 여전히 버팔로 사냥이 이어진다.

  버팔로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직업은 '카우보이(Cowboy)'였다. 소떼의 목축과 이동의 모든 과정을 담당하는 카우보이들은 서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전직 남군 기병대, 이민자, 멕시칸, 인디언, 그리고 흑인들도 있었다. 이 새로운 직종에서는 차별이 적었고 관대함과 활력이 넘쳤다. 그러나 목축 사업에 점차 큰돈이 몰리면서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서로의 이익을 두고 일어나는 폭력으로 총잡이와 보안관이 등장했다. 서부 영화의 주인공 '와이어트 어프(Wyatt Earp)'도 보안관으로 그렇게 이름을 알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부 영화의 주요한 상징들은 이 시기의 산물인 셈이다.

  남부 평원의 인디언들은 철도가 싣고 온 이주민들과 경쟁해야 했다. 인디언들의 저항은 군대의 토벌로 이어졌다. 1854년부터 1890년까지 수족과 샤이엔족 인디언들은 싸움에 나섰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치는 1874년에 끝난다. 필립 셰리든(Philip Sheridan) 장군은 지속적인 작전으로 인디언들을 굴복시켰다. 이어지는 'The West'의 6편에서는 인디언들의 최후의 결전이 펼쳐진다. 인디언들에게 이어진 피와 공포,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대평원에서 사라진 버팔로들과 함께 인디언들도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그 끝에서 인디언들이 만난 것은 어둡고 축축하고 황량한 보호구역(Reservation)의 삶이었다.  



*사진 출처: pbs.org  대륙 횡단 철도의 개통식(1869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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