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zz 9편   'The Adventure(1956-1961)'               1시간 54분
Jazz 10편  'A Masterpiece by Midnight(1961-2001)'    1시간 48분


  7편은 비밥의 문을 열었던 찰리 파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이어진 8편에서는 비밥(Bebop), 쿨 재즈(Cool Jazz)를 비롯해 실험적인 Avant-garde Jazz, Free Jazz가 융성했던 1960년대를 담아낸다. 2차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미국은 새로운 시대의 패권을 차지하며 황금기를 구가한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 인종 문제로 인한 갈등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다. 흑인들의 인권 운동이 본격화 되는 가운데, 재즈 음악계도 급변하고 있었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그 시기를 대표하는 재즈의 젊은 피였다. 찰리 파커와 함께 했던 비밥 시절을 거쳐 마일스 데이비스는 쿨 재즈의 탄생에 기여한다. 한편, 레이 찰스(Ray Charles)는 재즈에 블루스적인 감성을 결합시켰다.

  그런 가운데 엘비스 프레슬리는 블루스를 모태로 한 새로운 음악 락앤롤(Rock and roll)을 들고 나왔다. 그의 등장에 청중은 열광했고, 상대적으로 재즈 음악계의 지분은 축소되었다. 물론 뛰어난 인재들은 계속 나오고 있었다. 테너 색소폰 연주자 Sonny Rollins는 복잡한 화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재능을 선보였다.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는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과 음반 작업을 함께 하며 감성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그 시기에 대형 음반사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냈던 음반들은 크게 히트했고, 그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트럼펫 연주자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은 놀라운 재능과 함께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음악인이었다. 그 시기 재즈 음악계를 휩쓸었던 마약에 물들지 않았고,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다. '바른 생활 사나이'처럼 살았던 그는 비운의 교통사고로 서른 여섯의 삶을 마감한다. 찰리 파커의 이른 죽음과 함께 재즈 음악계가 감당해야했던 큰 손실이었다. 드러머 맥스 로치(Max Roach), 재능있는 피아니스트이며 가수였던 사라 본(Sarah Vaughan)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아트 블래키(Art Blakey)는 '재즈 메신저스(The Jazz Messengers)'를 이끌면서 '하드 밥(Hard bop)'을 만들어 나갔다. Blue Note 음반사와 함께 하며 명연주를 쏟아내던 블래키는 열정적인 순회 공연으로 이름을 알렸다. 

  듀크 엘링턴은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을 역전시킨 것은 1956년에 열린 Newport Jazz Festival이었다. 엘링턴은 기사회생한다. 루이 암스트롱의 전성기는 계속 이어졌다. 독보적인 트럼펫 연주자인 동시에 엔터테이너의 재능까지 겸비한 그의 위치는 견고했다. 흑인 인권 운동의 격랑 속에서 암스트롱은 분명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냈다. 예정된 공연이 줄줄이 보이콧 당하는 일을 겪었고, 1959년 이탈리아에 가서는 심장마비를 겪기도 했다. 1959년, 20년 동안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무대에 섰던 빌리 할러데이가 세상을 뜬다. 마약 중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재즈의 여왕이 숨을 거둘 때의 나이는 마흔 넷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의 한계를 실험하는 여정에 나섰다. Gil Evans와 협업한 음반 'Kind of Blue(1959)'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잘 나가는 거물 뮤지션이 된 그는 거침없이 부를 과시했고, 여자를 갈아치웠다. 데이비스는 정말로 놀라운 재능을 지녔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의 동료들이 성토하는 증언을 정리하면 이렇다.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 격동의 시기에 재즈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 오넷 콜먼(Ornette Coleman)이 등장한다.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극도의 실험적 재즈를 구사하는 콜먼의 음악은 'Free Jazz'라고 불린다. 이제 사람들은 '재즈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콜먼의 아방가르드적 실험은 이후 40년 동안 재즈 음악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자유와 혼란 속에 1960년대가 열린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10편에서는 1960년대 이후 이어진 재즈계의 변화를 살펴본다. 스탄 게츠(Stan Getz)는 카를로스 조빔과의 협업을 통해 보사노바(Bossa Nova) 열풍을 만들어 낸다. 그런 가운데 루이 암스트롱이 1971년에, 듀크 엘링턴은 1974년에 세상을 뜬다. 두 사람 모두 재즈 음악의 산증인이며 재즈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죽기 전까지 재즈 음악에 헌신했으며, 무대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이들이 퇴장할 무렵에 재즈 음악계는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었다. 나이든 세대의 청중들은 모두 TV 앞에 앉아 있었고, 젊은 세대는 재즈 음악을 즐겨 듣지 않았다. 무엇이든, 놀랍고 기발한 것이 필요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다. 다양한 악기와 장르를 재즈에 결합시킨 그는 Fusion Jazz를 선보였다. 말 그대로 데이비스가 개척한 음악의 길은 재즈의 새로운 길이 되었다.

  재즈의 침체 시기에 빛을 비춘 것은 다시 돌아온 거장이었다. 14년 동안 유럽에 머물렀던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이 귀환했다. 또한 윈턴 마샬리스(Wynton Marsalis)를 비롯해 새로운 세대가 재즈 음악을 하기 위해 모여든다. 재즈는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적 조류와 합류하며 자신의 물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말로 마무리되는 이 마지막 10편을 끝으로 켄 번즈의 재즈 음악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

  이 시리즈의 1편 제목은 'Gumbo'였다. 미국 남부 뉴올리언즈에서 유래된 이 요리는 다양한 채소와 해산물을 섞어 만든 일종의 잡탕 수프이다. 거기에는 아프리카, 프랑스, 스페인의 요리 유산이 접목되어 있다. 초창기 재즈의 탄생도 그와 같았다. 가스펠, 아프리카 뮤직, 카리브 민속 음악 등 여러 종류의 음악이 합쳐져 탄생한 '재즈'는 변화와 혁신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 어느 누구도 '재즈'의 정의에 대해 쉽게 말하기 어렵다. 그 다양한 음악적 색채와 역사가 재즈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켄 번즈의 이 미니 시리즈는 재즈가 '미국 남부 흑인의 음악'에서 '세계인의 음악'이 되기까지의 역동적인 과정을 잘 담아냈다. 



*사진 출처: rollingstone.com     Miles Da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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