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빠죄아. 작년에 방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불륜에 빠진 남편이 아내에게 했던 유명한 대사이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 또 있다. 홍상수의 2017년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에 나오는 영희(김민희 분)와 상원(문성근 분)이 그들이다. 배우인 영희는 유부남 영화 감독 상원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2부로 나누어져 있는 이 영화는 1부는 독일 함부르크, 2부는 한국의 강릉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것처럼 보이는 영희는 낯선 외국의 도시에서 선배 지영을 만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오랜 지인들과 만남을 갖는다. 관객들은 영희가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 이 배우가 처해있는 상황과 감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실제 이 영화의 감독 홍상수와 연인 사이이기도 한 김민희는 영화 속 영희를 통해 현실의 자신을 연기한다.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구 살고 있어. 다 사랑 받을 자격 없어요!"

  강릉에서 지인들과 함께 가진 술자리, 갑자기 영희는 '사랑 받을 자격'을 운운하며 좌중을 향해 일갈한다. 어째 영희가 하는 대사가 아니라 홍상수가 자신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퍼붓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는 '우리 제발 사랑하게 해주세요!', 가 아니라 '당신들이 뭔데 우리 사랑에 대해 떠드는 거야?', 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희의 지인 준희(송선미 분)와 천우(권해효 분)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영희의 사생활을 비난하는 이들을 천박한 관심을 지녔다며 폄하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연애 보고서인 동시에 대중들을 향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어느 정도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 시선의 끝에서 당사자인 감독과 여배우를 마주한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들에서 자아가 반영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왔다. 이전까지 관객들은 그 캐릭터들이 감독 본인의 부분적 특성이거나 주변 지인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옥희의 영화(2010)'에서 역시 감독으로 나왔던 문성근이 여기서도 감독으로 나온다. 우리는 문성근이 연기한 상원이 홍상수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대사들에 귀를 기울인다. 상원은 영희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피폐해졌는지를 토로한다. 이 자의식 과잉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상원'이란 캐릭터는 영희에게 주고 싶은 책이 있다며, 체호프의 책 구절로 절절히 사랑 고백을 늘어놓는다. 아, 난 그 부분에서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홍상수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은 한결같은 일관성을 갖고 있다.

  '해변의 여인(2006)'에서 주인공 중래가 해안가 사구의 나무에게 절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개인적으로 그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그 장면이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도 함부르크에서 산책하다 말고 다리 앞에 멈춰서서 갑자기 땅에 대고 절한다. 두 인물들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나무 장면은 지극히 속물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캐릭터인 영화 감독 중래가 보여주는 어떤 순수의 한 조각, 생에 대한 열망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모습과는 다르게 본질적인 것, 숭고한 것의 의미를 찾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사랑과 예술은 그의 손에 잡히지 않고 너무 먼 곳에 있다. 그런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상원은 사랑을 얻었고, 그 사랑을 심하게 앓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상원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이 그렇다는 것 뿐이다.

  그의 고백을 듣고 있는 영희의 입장은 어떨까? 영희는 상원이 늘 주변에 예쁜 여자들을 둔다며 힐난하고,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퍼붓는다. 정말 둘이 저렇게 살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해변에 누워있던 영희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행인에 의해 꿈에서 깬다. '여러분, 이거 다 꿈인 거에요.' 그렇게 홍상수는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 관객의 어깨를 툭 친다. 그의 이 영화는 사실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그 설정에 균열을 가한다. 1부에서 등장한 '검은 옷의 남자'가 그러하다.

  공원에서 함께 산책하던 지영과 영희는 시간을 물어보는 낯선 남자와 마주친다. 검은 옷을 입은 이 남자는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안겨주고, 두 사람은 그와 또 한 번 마주칠 것 같자 피해 버린다. 그런데 그 남자는 해변가의 영희에게 나타나 영희를 들쳐 메고 가고, 그 장면과 함께 1부가 끝난다. 2부에서 검은 옷의 남자는 영희가 머무는 콘도에 나타난다. 해안가로 난 베란다의 창을 열심히 닦고 있는 그를 영희와 준희, 천우 모두 안보이는 것처럼 행동한다. 홍상수가 설치해놓은 이 '낯설게 하기' 같은 연극적 장치는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핍진성에 의문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어떤 면에서는 홍상수 자신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영희(영화 속에서도 직업은 배우이다)이며 현실의 배우 김민희의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사랑에 빠진 이 여배우는 슬프고 외로우며,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배우의 연인인 감독은 영화 내내 영화와 현실은 다른 것이라고 계속 외쳐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화 속 영희는 표정과 연기, 심지어 직접 부르는 연가를 통해서 자신의 넘쳐나는 사랑을 입증해 보인다. 영희는 겉으로는 상원과 헤어졌다. 그럼에도 내적으로는 여전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니, '연결'이라는 표현 보다는 '예속'되어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 영희는 상원이 나오는 꿈을 꾸는가? 꿈 속에서 영희는 상원에게 표독스럽게 굴며, 상처받고 정체된 자신의 삶을 날것 그대로 내보인다. 현실의 영희는 그것을 상원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권력 관계에 있기 때문에, 꿈의 힘을 빌어서만 상원과 대등한 또는 보다 나은 우월적 위치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강릉에 도착한 영희는 영화관에서 지치고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도망친 여자(2020)'에서도 주인공 감희의 영화관 장면이 나온다. 감희는 계속해서 들이치는 파도가 나오는 영화를 본다. 사랑의 환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웠던 여배우는 이제 조금은 관조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일까? 감희의 표정에 심한 고뇌나 불안의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도망친 여자'의 감희에게서는 활기가 보이지 않으며, 지루함이 읽혀진다. 2019년, 감독의 이혼 소송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두 사람은 여전히 불확실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들려주는 개인사의 영화적 변주곡인 셈이다. 이 영화의 뻔뻔스러움은 많은 관객들에게 냉소를 짓게 하겠지만, 그럼에도 김민희의 연기는 가슴 한구석을 저리게 만든다. 관객들은 이 배우가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 트로피인 은곰상을 품에 안은 것을 그저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 On the Beach at Night Alone  (By Walt Whitman)


On the beach at night alone,
As the old mother sways her to and fro singing her husky song,
As I watch the bright stars shining, I think a thought of the clef of the universes and of the future.

A vast similitude interlocks all,
All spheres, grown, ungrown, small, large, suns, moons, planets,
All distances of place however wide,
All distances of time, all inanimate forms,
All souls, all living bodies though they be ever so different, or in different worlds,
All gaseous, watery, vegetable, mineral processes, the fishes, the brutes,
All nations, colors, barbarisms, civilizations, languages,
All identities that have existed or may exist on this globe, or any globe,
All lives and deaths, all of the past, present, future,
This vast similitude spans them, and always has spann’d,
And shall forever span them and compactly hold and enclose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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