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rvana의 커트 코베인은 이 영화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Smells Like Teen Spirit' 뮤직 비디오의 분위기와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학교를 점거한 아이는 치어리더의 응원술을 마구 흔든다). 영화의 제목은 'Over the Edge', 시나리오를 본 이들은 제작을 꺼렸다. 하지만 제작자 조지 리토(George Litto)는 과감하게 제작에 착수했고, 젊은 조너선 캐플란을 감독으로 내세웠다. 로저 코먼 아래서 그저 그런 돈 되는 영화나 찍으면서 초창기 영화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던 캐플란은 이 영화로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입증해 보인다. 비록 영화는 영화관에 얼마 걸리지도 못하고 내려졌으나, 그 진가를 알아본 관객들에 의해 점차 독보적 위치를 확보해 나갔다.

  콜로라도 주, 어느 교외에 위치한 계획 도시 New Granada. 황량한 허허벌판에 급조된 듯한 이 마을에 아이들의 오락거리라고는 'Rec(레크리에이션 센터)'라고 부르는 작은 건물 밖에 없다. 이제 14살이 된 중학생들은 온갖 비행의 집합체들처럼 보인다. 비비총으로 경찰차를 쏘아맞추는가 하면,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신다. 해시시를 공급하는 아이도 있다. 부모나 선생들 말 안듣는 것은 기본, 경찰도 우습게 생각한다. 마을의 경찰 도버만(Doberman)은 그런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골머리를 썩는다. 그가 해시시 공급책 아이 팁을 강압적으로 체포한 것을 계기로 아이들의 반감은 점점 커져 간다. 그 중심에는 칼과 리치가 있다. 리치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추격하는 도버만, 리치는 장전하지 않은 총을 꺼내어 들고 도버만은 리치를 쏜다. 칼은 리치의 죽음에 분노하고, 아이들을 규합해 항의의 뜻을 보여주려고 한다. 학교에서 학부모들과 경찰이 모여 학생 폭력 예방 대책을 의논하는 동안, 아이들은 대대적인 파괴극을 감행하는데...

  1970년대 미국에서 청소년 폭력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청소년의 기물 파괴, 그에 수반된 폭력 범죄에 대한 통계를 인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시나리오를 쓴 찰스 S. 하스와 팀 헌터는 197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 포스터 시티(Foster City)에서 벌어진 청소년 범죄 사건을 취재했다. 포스터 시티는 수로를 운행하는 작은 배로만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고립된 마을이었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취재 과정에서 그곳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이들의 지루함과 분노를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Over the Edge'에 반영되었다. 현실과 영화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의 결말이 좀 더 과격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칼의 아버지는 부동산 업자로, 칼(마이클 크레이머 분)은 중산층 계층에 속해있다. 멋진 빌라촌에 사는 칼과 달리 친구 리치(맷 딜런 분)는 그보다는 못한 허름한 아파트에 산다. 그러나 칼과 리치를 비롯해 그들의 친구들은 가난하고 폭력에 노출된 하층민 계층의 아이들이 아니다. 14살,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은 자신들을 강제하는 기존의 권위와 관습에 거부감을 보인다. 영화는 마치 청소년 다큐멘터리처럼 아이들의 일상을 뒤쫓는다. 실제로 출연한 그 나이 또래 아역 배우들은 별다른 연기 경험이 없이 캐스팅 되었고, 학교와는 거리를 둔 아이들이었다. 리치 역의 맷 딜런도 마찬가지였다. 백인, 중산 계층의 아이들이 영화 속에서 벌이는 폭동은 꽤나 충격적이다.

  물론 주인공 칼에게는 그런 일을 벌이는 동기가 있다. 절친 리치를 죽게 만든 것은 도버만으로 대표되는 억압적이고 부조리한 공권력, 자신들에게 아무런 꿈과 희망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사회와 어른들이다. 임시 가건물 같은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시간이나 때우는 것이 전부인 아이들은 나름대로 세상을 탐험해 나간다. 어른들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에는 술과 대마초, 자유분방한 이성 관계, 반항과 폭력이 자리한다. '저거 실화냐?'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은 '괴물'처럼 비춰진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안도 갖고 있지 않다. 학교에서 열린 임시 학부모 회의, 교장과 경찰의 담화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1970년대 록밴드 Cheap Trick의 'Surrender'를 틈날 때마다 듣는 칼, 가사는 늘 복종을 요구하는 부모에게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리치의 죽음으로 발화한 아이들의 응축된 분노와 절망감은 절제되지 않은 폭력, 파괴, 방화로 나타난다. 캐플란은 싸구려 착취 영화(exploitation film)를 찍으면서 쌓은 내공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터뜨린다. 아이들에 의해 학교에 감금된 어른들은 속수무책이다. 마치 린제이 앤더슨의 'If....(1968)'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옥도는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준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초반부에 수업 시간의 슬라이드로 제시된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무시무시한 그림과 절묘하게 겹친다. 15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화가 보스는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으로 상상 속의 기괴한 풍경을 그려냈다.

  'Over the Edge'는 청소년의 폭력 행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상영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지만, 이 영화를 둘러싼 그런 조치들은 당시 미국 사회가 갖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을 드러낸다. 기성 세대들은 어린 세대들을 자유와 방종, 혼란의 집합체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보수적인 레이건 시대의 개막과 맞물려서 기존의 사회 체제를 강력하게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변혁의 출구는 막혔고, 막힌 물줄기는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가 되어서야 새로운 세대의 문화로 터져나왔다. 'Over the Edge' 같은 영화들은 그 세대들의 자양분과도 같았다. 그렇게 영화는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 시간의 압력을 견뎌냈다. 사회적 관심사를 반영한 이 영화는 캐플란 영화 경력의 전환점이 된다. 그의 1988년작 '피고인(The Accused)'은 'Over the Edge'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영화의 마지막, 경찰차에 호송되는 아이들의 장면에 흐르는 노래는 Valerie Carter의 포크 록 'Ooh Child'이다. 영화 내내 휘몰아쳤던 록 밴드 Cheap Trick의 음악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이 노래의 가사는 아이들이 밝게 빛나는 길을 걸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제작자 조지 리토는 The Who의 거친 록 음악 'Baba O'Riley'를 쓰자는 캐플란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이 생각한 노래를 밀었다. 그는 어둡기 짝이 없는 영화의 결말에 빛을 드리우고 싶어했다(출처 vice.com 2009년 9월 기사). 이 영화의 마지막에 'Baba O'Riley'가 흐르는 버전을 보고나서, 개인적으로는 리토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다. 기성 세대이자 제작자로서 리토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가 대책없는 허무와 폭력으로 난파되기 보다는, 그래도 희망의 한 조각을 품고 살아남기를 바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리토의 바램대로 이 영화는 미국 청소년 영화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었다. over the edge, 벼랑 끝에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새로운 세대의 변주곡처럼 현재에도 반복된다.    



*사진 출처: vi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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