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타임 2시간 50분, 노래와 춤이 나오는 인도 영화는 극장 상영시 중간 휴식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긴 영화들이 많다. 라지 카푸르(Raj Kapoor) 감독의 1955년작 'Shree 420'은 7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도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영화는 엄청난 흥행 성적을 거두었고, 그가 만든 영화들은 신생 독립국 인도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감독 자신이 주연을 맡아서 노래와 연기를 소화해내는데, 이 다재다능한 영화인은 찰리 채플린을 모방한 연기로 인도의 채플린으로 불렸다. 채플린의 고유한 연기 스타일인 떠돌이, 부랑자의 이미지를 차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여줄 것이 아주 많음을 이 영화로 입증한다.

  고향 알라하바드를 떠나 봄베이로 온 시골 청년 라지는 곧 도시의 삶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도 그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세탁소 일 뿐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비드야를 만나 미래를 꿈꾸던 라지는 클럽 댄서 마야의 유혹으로 사기꾼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비드야는 라지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지만, 돈의 위력에 사로잡힌 라지는 부도덕한 사업가 소나찬드의 수하가 되어 도박과 사기 사업에 손을 댄다. 큰 돈을 만지게 되었지만 불행하다고 느낀 라지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소나찬드는 라지의 이름을 팔아 봄베이 빈민들을 상대로 커다란 사기극을 꾸민다. 라지는 사기꾼 생활을 청산하고 비드야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 'Shree'는 힌디어로 호칭 '~씨'에 해당한다. 숫자 '420'은 인도 형법에서 사기와 절도에 해당하는 죄목의 번호를 뜻한다. 인도에서 'Mr. 420'이란 말은 사기꾼을 뜻하는 말로, 경멸의 의미를 포함한다. 정직함으로 메달까지 받았던 라지는 돈이 떨어져 전당포에 그 메달을 맡긴다. 먹을 것도, 잘 곳도 없는 그에게 대도시 봄베이의 삶은 라지를 돈에 목마르게 만든다. 정직을 던져버리고 유능한 사기꾼이 된 그는 소나찬드를 비롯해 사업가와 유력 인사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을 목격한다. 자신의 집을 갖기 원하는 빈민들에게 100루피로 집을 주겠다며 라지의 이름을 내걸어 사기극을 벌이는 소나찬드야말로 진짜 'Shree 420'이다. 귀에 착착 감기는 즐거운 노래와 춤이 있는 이 영화에는 날카로운 사회 비판의 메시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고, 가난한 이들이 길바닥에서 자는 봄베이의 삶. 제대로 된 사회 안전망도 없는 나라에서 정직한 젊은이는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 사기꾼은 결국 회심(回心)한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라지는 빈민들을 상대로 단합과 연대를 호소한다. 모래알처럼 흩어져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힘을 합쳐 우리의 요구를 정부에 전달해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라지의 연설은 사회주의적 신념과 맞닿아 있다. 'Shree 420'이 드러낸 인도 사회의 문제점은 매우 통렬하다. 과연 오늘날의 인도는 영화 속 라지가 촉구한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냈는가? 지금의 인도가 이루어낸 경제 성장의 이면에 여전히 극심한 빈부 격차가 존재한다. 그 점은 한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한다. 라지가 보여주는 도덕적 타락과 일탈은 하층 계급이 직면하는 윤리적 갈등을 보여준다. 정직한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라지는 사기꾼이 된다. 그가 나중에 마음을 돌이킨 것은 사기로 고통받게 될 빈민가 사람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Shree 420'은 계급적 연대와 도덕적 선택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영화는 진중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와 함께 영화적 즐거움을 전면에 앞세워 관객들을 유인한다. 선의 상징으로 나오는 비드야와 대척점에 선 마야가 보여주는 도발적인 춤 공연, 여러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군무와 합창, 빼어난 호흡을 보여주는 비드야와 라지의 이중창은 긴 러닝타임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Shree 420'을 만나는 오늘날의 관객들은 현재 인도 영화의 산업적 토대와 그 기원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라지는 비드야와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길을 떠난다. 인도 영화가 자국 내에서 구축한 독보적 지위는 오랜 전통과 함께 라지 카푸르 같은 재능있는 영화인들이 개척해낸 길 위에 세워진 것이다.    



*사진 출처: discogs.com




*다음 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무더운 여름,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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