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ch'라는 영어 단어가 있다. 속어로 쓰이는 이 단어는 남에게 무언가를 뜯어낸다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면 담배 한 개피 얻는 것, 빈대를 붙는 행위 같은 것들을 총칭한다. 그다지 좋지 않은 어감의 단어인데, 에릭 로메르의 '사자 자리(Le Signe Du Lion, 1959)'를 보는 내내 그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주인공 피에르는 가진 돈이 다 떨어져서 어떻게든 자신의 친구와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파리 시내를 헤매고 다닌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뜨거운 한여름의 파리에 그가 빌붙을 친구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났다. 해외 출장을 가거나, 더위를 피해 휴가지로 가버렸다. 명색이 작곡가로 파리 문화계에 나름의 인맥을 갖고 있는 피에르는 노숙자로 전락한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에릭 로메르의 장편 데뷔작 '사자 자리'는 별자리의 운명을 믿는 남자 피에르의 천국과 지옥을 그린다.

  피에르(제스 한 분)의 천국은 한 장의 전보에서부터 시작된다. 후사가 없는 부자 친척 아주머니의 부고는 피에르에게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다. 조카인 자신에게 상속이 될 거라 믿는 피에르는 친구들을 죄다 불러 모아 흥청망청 파티를 연다. 그저 그런 작곡가로 파리 생활을 겨우 겨우 버티던 이 독일계 미국인은 자신의 별자리인 사자 자리가 이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고 믿는다. 술, 음악, 여자 친구, 거기다 객기 넘치는 한 밤의 총질까지 피에르의 자축 파티는 날이 새도록 이어진다. 그런데 별자리의 운명이 피에르를 배반한 것일까? 유언장에 적힌 상속자는 피에르가 아닌 다른 사촌이었던 것. 피에르는 그렇게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다. 가진 책들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고, 나중에는 숙박비를 내지 못해 허름한 호텔에서도 쫓겨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파리의 지인들을 수소문하며 다니는 피에르. 거는 전화마다 어디론가 떠나서 없다는 대답만 듣는다. 단벌 양복 바지에는 청어 통조림 뜯다가 흘린 기름이 묻어 있고, 수중에는 정말이지 땡전 한 푼도 없다. 그는 푹푹 찌는 7월의 파리를 무작정 걷는다. 피에르의 행색은 시간이 갈수록 그가 지나쳐가는 파리의 거지와 노숙자를 닮아간다.

  에릭 로메르는 다큐멘터리적인 구성으로 피에르의 몰락을 그려낸다. 6월 22일에 부고 전보로 시작된 피에르의 행운은 7월 13일에는 유언장 내용을 알리는 전보에 의해 끔찍한 불운으로 귀결된다. 그때부터 시작된 피에르의 처절한 파리 생존기는 노숙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로메르는 피에르가 헤매고 다니는 파리 시내 곳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회화적으로 배치한다. 나들이 나온 연인들과 가족들, 유람선의 관광객들, 카페의 여유로운 사람들... 피에르의 눈에는 자신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물건 훔치다 들켜서 망신당하고, 강가에 떠내려온 과자 봉지 건지려고 애를 쓰고, 피에르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육체 노동을 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룸펜 예술가에게 몸을 쓰는 일은 생존 선택지에 없다. 피에르의 몰락은 너무나도 처절하게 그려지지만, 거기에는 로메르만의 유머 감각이 느껴진다. 로메르의 세계에서 운명과 우연의 힘을 늘 발견했던 관객들이라면 어딘가에서 터질 피에르의 인생 한 방을 기다리게 된다.

  로메르는 피에르에게 닥친 행운과 불운을 시간에 따른 이미지로 변주한다. 피에르가 노숙자가 되기까지의 행색의 변화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땀에 절은 양복, 면도를 하지 못해 덥수룩해진 수염, 지워지지 않는 바지의 생선 기름 얼룩을 보면서 관객들은 피에르가 가진 것 가운데 그나마 온전한 것이 신발이라는 점을 인지하게 된다. 그때, 카메라는 터벅터벅 걷고 있는 피에르의 뒷모습과 함께 구두를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가 피에르의 구두는 돌부리에 채여 터져 버린다. 로메르의 세계는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으며, 운명론이 지배하는 그 세계에서 돌발적인 변수와 일탈까지도 조화에 기여한다. 완전 거지꼴로 노숙자가 되어버린 피에르가 친구에게 발견된 것은 카페에서 자신의 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때이다. 그 친구가 전한 소식은 피에르가 믿는 사자 자리의 행운이 결코 허황된 미신이 아님을 입증한다.

  이 영화에 쓰인 음악은 프랑스의 현대 음악 작곡가 Louis Saguer의 바이올린 소타나이다. 음울하고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은 피에르의 몰락을 따라가며, 그가 처한 운명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데에 기여한다. '사자 자리'는 1959년에 만들어졌으나 3년 뒤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영화는 상업적으로 철저히 실패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후 로메르가 만들어갈 거대하고 기이하며 아름다운 영화 세계의 전주곡으로 남는다. 피에르의 인생역전을 그린 '사자 자리'에는 그렇게 로메르의 영화적 세계에 대한 청사진이 담겨 있다.  
 



*사진 출처: listal.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