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가 보여주는 담론의 공간; 나무, 시장과 미디어 라이브러리(L'Arbre, le Maire et la Médiathèque, 1993)

  영화는 시골 초등학교의 수업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마크는 아이들에게 '만약(If) ~ 한다면'이라는 조건문의 용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중이다. 영화는 7개의 장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매 장마다 조건문이 제시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장: 만약에 1992년 지방 선거 전날에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소수당이 되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예기치 않은 7개의 '우연'이 인물들의 생각과 그들이 개입된 사건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보게 된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1993년작 '나무, 시장과 미디어 라이브러리(The Tree, the Mayor and the Mediatheque)'은 시골 마을에 세워질 복합 미디어 센터를 두고 대립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서 '정치'가 다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나무, 시장과 미디어 라이브러리'는 얼핏 보기에 로메르의 정치적 관점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신념과 가치관의 차이, 그것이 가져오는 변화와 파장이다.

  Vendée 라는 작은 마을의 시장 줄리앙은 주민들을 위한 복합 미디어 센터를 세우려고 한다. 비록 그가 속한 사회당이 선거에서 패배해서 소수당이 되기는 했지만, 전에 문화부에서 따온 예산으로 건축은 이미 설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 마크는 그 건물이 마을의 경관을 해치고, 외지인들의 유입은 환경 오염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줄리앙은 미디어 센터를 짓게 되면, 외지인들의 방문이 늘어나고 그런 활기가 마을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한다. 그는 언론의 도움을 기대하며 친척이 소개해준 저널리스트 블랑딘의 취재에 협조한다. 블랑딘은 마을 사람들과 인터뷰도 진행하는데, 건물 신축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마크의 주장을 흥미롭게 듣는다. 마침내 나온 블랑딘의 기사는 줄리앙의 바램과는 달리 마크의 인터뷰를 부각시킨 것이었다. 과연 줄리앙이 바라는 대로 미디어 센터는 지어질 수 있을까?

  에릭 로메르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들 속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줄리앙이 여자친구 베레니스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그는 결코 개발지상주의자가 아니다. 줄리앙은 자연을 사랑하고 소박한 시골 생활에도 만족한다. 중앙 정치로 진출해 보라는 베레니스의 권유에도 시장 업무가 우선이라고 말한다. 시장으로서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려는 그의 성실한 자세는 '복합 미디어 센터'라는 꿈과 맞닿아 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최대한 환경친화적으로 건물을 지으려는 줄리앙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는 시골 마을도 도시화의 추세에 따라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크는 그런 그와 정반대의 지점에 서있다. 마크의 생각은 아내와 딸과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그는 건축 계획이 의회로 진출하려는 줄리앙의 정치적 야심에서 나온 것이며, 결국 그 건물은 마을의 흉물이 될 거라고 본다. 마크는 시골의 풍경은 훼손되지 않아야할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의 생각을 상징하는 것은 건축 부지에 있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이다. 그는 그 나무가 베어지게 된다면 마을을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크는 정작 자신의 의견을 줄리앙에게 직접 말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혼자 궁시렁대는 뒷방 늙은이처럼 단지 부인과 딸에게 자신의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110분에 이르는 러닝 타임 동안 관객들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가상의 건물을 두고 벌어지는 대화의 향연을 목격한다. 여기에는 환경보호론자와 개발주의자의 관점, 정치와 관료주의, 쇠락해가는 농촌 마을의 현실, 편향된 언론이 특정 사건에 미치는 영향이 마치 옷감의 무늬를 짜듯 촘촘히 배치된다. 로메르의 특기란 그런 것이다. 그는 인물들의 일상적 대화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영화에는 어떤 대단한 정치구호나 시끄러운 시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각자가 가진 생각을 말하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비록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의 차이를 확인했다 하더라도 그런 대화의 기술은 다양한 관점에서 하나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블랑딘이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농촌의 삶과 신축 건물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개발과 자연보호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줄리앙에게 의견을 피력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마크는 편협하고 독단적인 사고방식에 갇힌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 아빠와는 달리 10살된 마크의 딸 베가는 대화를 통한 소통과 타협의 가치를 알고 있다. 똑똑하고 야무진 소녀는 줄리앙에게 마을에 미디어 센터가 필요하지 않는 이유와 그 대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곤조곤 일러준다.   

  영화를 보고나면 그런 의문이 든다. 로메르는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1980년대와 9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여러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개발 바람과 함께 신축 건물들이 들어섰고, 현지 주민들의 필요와 의견을 고려하지 않은 쏟아붓기 식의 행정적 낭비라는 지적이 나오게 되었다. 정치인들은 정책을 세우고, 건축가는 그 정책에 따라 건물을 짓는다. 그런 실제적 행위는 사람들의 일상에 때론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로메르는 푸른 잔디밭과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곳에 들어설 가상의 미디어 센터를 대비시킨다. 관객들은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그 두 풍경 가운데 하나의 것을 선택했을 때를 상상해 보게 된다. 어떤 선택이든 절대적으로 옳고 좋은 것은 없다. 아마도 로메르는 그 선택의 기로에서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는 담론의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로메르의 소박하지만 흥미로운 영화 작업은 '나무, 시장과 미디어 라이브러리'로 남았다.  



*사진 출처: filmsdulosange.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