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사 음악 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콘스탄틴은 재즈 연주를 했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의 대상이 된다. 재즈가 부르주아의 음악이라는 당원들의 비난에 콘스탄틴은 재즈는 억압받는 하층민의 음악이라고 응수한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난 그는 소련 최초의 재즈 밴드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는다. 가난한 길거리 악사로 살아가던 스테판과 조라가 콘스탄틴의 밴드에 합류한다. 그들의 첫공연은 재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객들의 야유로 엉망이 된다.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콘스탄틴의 재즈 열정에 색소폰 연주자 이반도 뜻을 같이 한다. 밴드는 자신들의 큰뜻을 펼치려고 모스크바로 떠난다. 과연 콘스탄틴의 밴드는 성공할 수 있을까?

  카렌 샤크나자로프(Karen Shahknazarov) 감독이 1983년에 만든 이 영화의 영어 번역 제목은 'We Are from Jazz(Мы из джаза)'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이 없어서 나는 '우리는 재즈 피플'로 적어보았다. 영화의 배경은 1920년대,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아니, 무슨 소련에 재즈 음악이 있었다는 거야? 그것도 1920년대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할 수 없다. 재즈 음악이 흐르는 이 독특한 소련 뮤지컬 영화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우리는 재즈 피플'은 약간은 비어있고 엉성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밴드에서 드럼을 맡고 있는 조라가 흑인 분장을 하고 오디션을 보는 장면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인종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영화에는 소련에 공연을 하러 온 쿠바 재즈 가수 클레멘틴이 등장하는데, 그 배역을 맡은 라리사 돌리나도 흑인 분장을 해야 했다.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분장을 견딜 수만 있다면, 그 인내에 영화는 보답한다. 영어로 연주되는 재즈 송이 정말 멋지기 때문이다(실제로 노래는 라트비아 출신 여가수가 불렀다). 영화에는 1920년대 재즈의 주류였던 래그타임(ragtime) 연주와 탭댄스 장면도 나온다. 콘스탄틴을 맡은 이고르 스클리야는 피아노를 배워야 했고, 다른 배우들도 탭댄스와 악기 연주 연기를 위해 교습을 받았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여러모로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애를 썼다.  

  콘스탄틴은 밴드의 성공을 위해 클레멘틴의 환심을 사서 계약을 성사시키려고 하지만 돈만 날린다. 밴드는 당의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협회를 찾아가 어렵게 공연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재즈 음악에 대한 당국의 전면적인 금지령이 내려지고, 콘스탄틴과 밴드 친구들은 낙담한다. 그 시대는 콘스탄틴의 재즈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돈은 떨어지고, 연주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결국 소련 최초의 재즈 밴드는 그대로 사라지고 마는 걸까? 영화의 마지막, 흰머리의 콘스탄틴과 친구들이 빛나는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친다. 철의 장막 소련에서, 그렇게 재즈는 살아남았다.

  아무리 그래도 소설을 너무 심하게 썼네, 라고 생각할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러시아 영화 잡지 사이트를 둘러 보다가, 이 영화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영화 '우리는 재즈 피플'은 허황된 '소설'이 아니었다. 영화 속 배역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실제의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콘스탄틴의 모델은 1930년대에 소련의 재즈 오케스트라를 이끌었고, 많은 재즈 음악을 작곡한 알렉산드르 발라모프(Alexander Varlamov)였다. 그는 샤크나자로프 감독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고, 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나리오가 쓰여졌다. 영화 속에서 콘스탄틴이 존경하는 재즈 애호가 해군 장교가 나오는데, 그 또한 역사 속의 인물이었다. 대단한 재즈광이며 많은 재즈 음악회를 기획했던 해군 장교 세르게이 콜바셰프(Sergei Kolbasyev)의 실제 삶은 비극으로 끝났다. 1937년에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서 결국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등장한 재즈 가수 역도 실제 인물이 있었다. 코레티 아를(Coretti Arle)이라는 미국 출신 흑인 재즈 가수는 러시아 유태인과의 결혼으로 이주한 1900년대 초부터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서 가수와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소련에서 재즈는 스탈린 시대를 거치면서 부르주아 음악으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1940년대에 많은 재즈 밴드들은 해체되었지만, 지하 문화 운동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흐루시초프 시절의 해빙기에 잠깐의 자유를 구가했다. 소련의 영화 음악으로도 재즈는 계속적으로 쓰이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1983년에 소련에서 만든 '우리는 재즈 피플'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재즈라는 음악의 질긴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크게 흥행했고, 1983년 최고의 소련 영화로 뽑히기도 했다.



*사진 출처: paolo-74.live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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