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골의 농민들이 일본군으로부터 전사한 이들의 유골함을 받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유골함에는 일장기가 꽂혀 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일본 군가와 경쟁하듯 농민들이 부르는 피리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불협화음의 여운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두 집단의 근원적 차이를 보여준다. 뉴 타이완 시네마(New Taiwanese Cinema)를 이끌었던 대만의 왕툰(王童)감독은 50년이 넘는 영화 경력 기간 동안 15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현대 대만 3부작이 유명하다. 'Strawman(1987)', 'Banana Paradise(1989)', 'Hill of No Return(1992)'은 농촌과 자연을 배경으로 대만의 굴곡진 현대 역사를 담아냈다. 그 첫 번째 작품 '허수아비'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가혹하게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고통을 그려낸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2차 대전의 끝무렵, 가난한 시골 농부인 진파의 가족은 굶주림에 시달린다. 참새떼는 끊임없이 곡식을 쪼아먹고, 일본의 수탈은 갈수록 더해져서 키우던 소마저 빼앗긴다. 가장 진파에게는 귀가 어두운 노모, 덜 떨어진 동생, 남편이 전사한 뒤로 미쳐버린 막내 여동생, 그리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있다. 진파가 기댈 곳이라고는 참새를 내쫓기 위해 세워둔 허수아비와 동네 산신각 뿐이다. 그는 틈만 나면 제발 먹고 살게만 해달라고 빈다.


  그의 노모는 밤마다 형제의 눈에다 소똥을 몰래 바르는데, 그건 눈병을 핑계로 아들들에게 나온 징집 영장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들이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마을에 주둔하는 일본 순사는 수시로 마을을 돌며 감시하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천황의 은혜는 태양과 같은 것이라고 교육받는다. 일제의 식민지 자원의 침탈은 문고리를 뜯어오고 포탄을 주워오는 일을 아이들에게 강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포탄 조각을 줍기위해 미군의 폭격이 이루어지는 다리밑에서 소쿠리를 가지고 기다린다. '허수아비'에는 그 누구도 죽거나 다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음에도 식민 통치의 엄혹함과 피폐함이 드러난다.

  대만의 일본 통치는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보다 더 이전에 시작되었다. '대만일치시기(臺灣日治時期)'라고 불리는 그 시기는 청나라가 청일전쟁의 패배로 대만을 일본에 할양한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 대전 당시에 일본은 21만 명의 대만인을 징집하였고, 그 가운데 3만 명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영화의 첫 부분은 그렇게 끌려간 대만 청년들의 희생을 상기시킨다. 일제는 사람과 함께 물자 수탈에도 적극적이었다. 쌀과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주도하면서 대만의 농민들은 노동력과 물산(物産)을 착취당했다. 영화에서 그 부분을 보여주는 인물은 진파의 여동생과 결혼한 일본인 사업가 야마모토이다. 그는 폭격이 심해진 도시를 떠나 아내의 고향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야마모토는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농장을 팔아버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농지는 진파 형제가 힘겹게 농사짓는 땅이다. 식민지인들에게 온전히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언제든, 무엇이든 빼앗길 수 있다.

  왕툰은 식민통치기 대만과 일본의 관계를 진파의 집 식사 장면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동생 내외와 일본인 순사 일가를 대접하려고 진파의 가족들은 어렵게 생선과 쌀밥, 반찬을 장만해서 내놓는다. 아이들은 그들이 음식을 많이 남기길 기대한다. 할머니는 손주들에게 부자는 생선의 앞면만 먹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뒷면까지 뒤집어서 알뜰하게 발라먹는다. 제일 어린 막내는 그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결국 그들이 먹게 된 것은 뼈와 대가리 뿐인 생선이다. 나중에 그 가족이 생선을 실컷 먹게 된 것은 미군 덕분이다. 진파 형제가 논에 떨어진 불발된 포탄을 바닷물에 내던지자, 죽은 물고기가 떼로 떠오른다.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매일 매일 폭격이 일어나면 그런 포탄들이 나올 테고, 그러면 생선을 계속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영화 '허수아비'는 그렇게 매끄럽고 보기 좋은 만듦새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서사는 툭툭 끊어지며, 배우들의 연기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만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제의 식민지 시절을 날카로운 비유와 풍자로 그려낸다. 관객들은 영화 속 농민들이 보여주는 무지와 순박함, 그리고 그런 그들을 삶의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군국주의의 잔혹함을 선명하게 파악하게 된다. 때로 역사란, 책에 쓰여진 길고 건조한 문장들 보다 그런 소박하고 간결한 영화 속의 이야기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왕툰 감독이 대만인으로서 이 영화를 만들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허수아비'는 기억해야할 대만의 역사에 대한 영화적 증언인 셈이다.   



*사진 출처: peiy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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