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볼로쟈는 자신이 쓴 단편소설이 잡지에 실린다. 그의 소설에 관심을 가진 작가의 초청으로 모스크바에 오게 된 그는 공항에서 흥얼거리는 젊은 여성과 마주친다. 누굴 기다리냐고 묻자 여자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볼로쟈는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여자는 결혼을 하라고,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답한다. 볼로쟈는 그런 일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한다.

  "날 믿어요. 반드시 행복해질 거에요."

  이 영화, 온갖 긍정과 낙관의 기운이 흘러넘친다. 그저 젊은 청춘들이 모스크바 거리를 쏘다니는 것이 전부일뿐인데도, 보고나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정말 사랑스런 영화다. 영화 속 모스크바의 거리는 활기가 가득하고, 젊은이들은 사랑하는 이와 희망에 찬 미래를 꿈꾼다. 게오르기 다넬리야 감독의 1964년작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Walking the Streets of Moscow)'는 소련의 '해빙기(The Khrushchev Thaw)'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볼로쟈는 지하철에서 같은 또래 콜랴와 우연히 알게 되어 친해진다. 머물기로 한 지인이 모스크바에 없다는 걸 알고 난감해 하는데, 콜랴가 자신의 집에 머무르도록 해준다. 콜랴에게는 군 입대를 앞두고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 친구 샤샤가 있다. 샤샤의 결혼 예복을 사기 위해 그들은 백화점에 들른다. 그곳 레코드 가게 점원 알료냐에게 볼로쟈와 콜랴가 관심을 보이고, 콜랴는 알료냐를 샤샤의 결혼식에 초대한다. 과연 알료냐의 마음은 누구에게로 기울어질까?
 
  '젊은이들이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영화'라는 흐루시초프의 비판 때문에 무참한 검열과 삭제를 당하는 운명을 겪었던 '나는 스무 살(Мне двадцать лет, 1965)'과는 달리,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는 살아남았다. 영화는 1963-64년의 모스크바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볼료자, 콜랴, 알료냐가 밤늦게까지 쏘다니며 바라본 모스크바는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젊은 여성은 즐겁게 비를 맞으며 맨발로 걷고, 우산을 든 청년은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며 여성에게 구애한다. 시민들을 위한 음악회와 신나는 놀이공원의 풍경이 모스크바의 야경을 채운다. 아마도 구 소련 시절을 엄혹한 철의 장막으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놀랄만한 영화다. 

  물론 이 영화의 그런 자유로움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흐루시초프 시절의 사회 문화적 '해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제한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린 쿠치예프 감독의 '나는 스무 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1959년부터 제작이 시작되었던 그 영화는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다. 쿠치예프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쓴 겐나디 스팔리코프는 무능하고 한심한 관료주의에 치를 떤다. 그는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소련 당국의 검열을 비판하는 장면을 은유적으로 집어넣는다. 콜랴와 함께 볼로쟈가 자신을 초청한 작가를 만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를 만난 자리에서 볼로쟈는 자신이 문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삶의 진실과 사람들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하자, 작가는 그런 건 죄다 쓸데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런 그의 말에 볼로쟈는 당황하는데, 그때 진짜 작가가 등장한다. 볼로쟈가 그때까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건물의 청소부였다. 자신이 관찰한 작가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흉내낸 청소부의 연기를 통해 스팔리코프는 예술에 무지한 검열 당국을 비꼰다. 그 장면이 가지는 의미를 당국은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의 초반부, 콜랴의 집 건너편 가게에서 영어와 팝송을 크게 틀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영어를 사용하는 일본인 관광객이 박물관에 가려고 택시를 타는 장면도 나온다. 당시 모스크바에 넘치는 자유와 활기는 그런 것이었다. 콜랴는 그런 모스크바를 걸으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젊은 날의 기쁨과 설레임에서 저절로 나오는 찬가이다.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
  어느 날 나는 태평양을 건너겠지
  툰드라와 타이가(taiga)도
  흰색의 닻을 올릴 거야
  그러다 향수병이 도지면
  눈 속에서 보라빛을 찾을 거야
  그렇게 모스크바를 떠올리겠지' (번역 푸른별)

  서정적인 노래와 함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촬영 감독이었던 바딤 유소프가 담아낸 유려한 모스크바 풍광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영화.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를 만나는 관객들은 영화 속 1963년의 모스크바 거리를 마냥 행복한 주인공들과 같이 걷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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