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영화 관련 기사를 읽다가 웨스 앤더슨이 추천하는 영화 목록을 보게 되었다. 관심있는 감독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감독의 영화 취향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져서 살펴보았다. 그가 추천한 10편의 영화 가운데 내가 아는 영화는 하나 밖에 없었다. 'Winter Kills(1979)'도 목록에 있는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찾아보니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냥 안좋은 것이 아니라 혹평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안보는 것이 낫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죄다 형편없다고 말하는 걸까 싶었다.

  영화의 원작은 리처드 콘돈이 쓴 동명의 소설이다. 콘돈은 영화 'The Manchurian Candidate(1962)'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그는 주로 정치 소설을 쓴 다작 작가였다. 소설 'Winter Kills'는 그가 1974년에 발표한 소설로 케네디의 암살을 소재로 여러 음모 이론을 접합시켰다. 이것을 윌리엄 리처트가 시나리오로 각색했고 감독까지 했다. 영화는 정말이지 초호화 캐스팅에 돈을 엄청 들인 티가 난다. 주연 배우로는 제프 브리지스, 존 휴스턴, 앤서니 퍼킨스가 나온다. 거의 단역에 가까운 배역임에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가 나온다. 갑자기 집사 역으로 등장한 미후네 도시로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미후네 도시로는 일본에 본인의 제작사가 있어서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도 출연료 욕심이 났던 걸까? 몇 마디 안되는 영어 대사 하려고 태평양 건너 미국에까지 왔나 싶었다. 뭔가 처량하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마찬가지. 테일러는 대사도 없다. 짧은 장면 등장하는데 그것도 크레딧에 올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이 영화가 1983년에 재개봉되었을 때 겨우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윈터 킬'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대통령이었던 이복형을 암살로 잃은 닉 키건(제프 브리지스 분)은 암살범을 자처하는 인물의 죽기 전 고백을 듣게 된다. 암살범은 암살 현장 근처에 사용한 총기를 숨겨두었다면서 그 장소를 닉에게 알려준다. 자신의 친구와 현장을 찾은 닉은 총을 찾아내는데 그 직후에 그의 친구가 총에 맞아 죽는다.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아버지(존 휴스턴 분)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고, 파 키건은 닉에게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줄 유력 인사들을 소개해 준다. 그러나 닉이 사건을 파헤치는 동안 과거 암살과 관련된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사건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진다. 과연 닉은 암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성과가 없는 일이다. 원작자 리처드 콘돈은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온갖 음모 이론을 총집합해 놓았고, 영화는 그것들을 정신없이 나열한다. 그냥 늘어놓기만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감독 윌리엄 리처트는 상당히 튀고 싶었던 모양이다. 스릴러에 코믹적인 요소를 더한다고 애를 썼다. 영화는 실패한 코미디에 얼척없는 서사가 겹쳐서 그야말로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리처트의 시도는 처참한 흥행 실패로 끝났다. 엄청나게 끌어다 쓴 제작비를 갚지 못해서 제작자 한 명은 개봉을 앞두고 살해당했고, 다른 한 명은 마약 관련 범죄로 기소당했다. 영화의 판권은 조각나서 팔렸다. 리처트는 나중에 어떻게 돈을 모아서 자신이 영화의 저작권을 사들여 재개봉했다.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영화다.

  '윈터 킬'이 절대적으로 망할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미국인들의 근원적 정서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명백히 케네디의 암살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그 비극적인 사건은 한심하고 조잡스러운 추측과 음모 속에서 쓰디쓴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미국인들에게 케네디는 미국의 이상과 꿈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죽음을 두고 '윈터 킬'은 마구잡이로 난도질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그것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도 실패한 작품이다. 소수 컬트팬들의 호응을 얻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구제불능에 가까운 이 영화에 구원의 빛을 드리우지는 못한다. 

  그나마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 보기를 견딜 수 있게 해준다. 감독으로 이름을 날린 존 휴스턴의 연기 재능도 확인할 수 있고, 아주 젊은 날의 제프 브리지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앤서니 퍼킨스의 짧지만 강렬한 연기도 좋다. 그런 배우들의 좋은 연기들이 이 처참한 영화 속에서 갈려나간다. 'Winter Kill'은 겨울의 추운 날씨에 호수나 강의 얼음이 두껍게 얼어 물고기들에게 필요한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서 죽는 현상을 가리킨다. 영화의 제목처럼 '윈터 킬'은 그 어떤 장점도 영화 속에서 질식해서 죽은 상태라 찾기가 어렵다. 이런 영화를 자신의 이름을 건 추천 목록에 올린 웨스 앤더슨은 정말 독특한 영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zekefilm.org 파 키건 역의 존 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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