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최근에 남동생을 잃었다. 남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인간은 경찰이 사고사로 결론내렸다며 뻔뻔하게 나온다. 남자는 분노의 눈물을 삼키지만 별 다른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놈이 찾아온다. 남자에게 자신의 복싱 스승이 되어달라고 간청한다. 남자는 전직 복서로 체급 챔피언의 자리에 있었으나 갑작스레 시합을 포기하고 복싱을 그만 두었다. 아내와 딸도 버리고 오직 도베르만 한 마리만을 돌보며 산다. 전단지를 붙이며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사는 삶. 그런 그가 원수 같은 놈을 위해 그 청을 수락할까? 테라야마 슈지 감독의 1977년작 '복서(The Boxer)'는 기이한 복싱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1976년에 개봉한 영화 '록키(Rocky)'는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수익을 냈다. 일본에서도 크게 흥행한 이 영화를 보고, 도에이 영화사는 비슷한 권투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감독은 테라야마 슈지, 주연 배우로는 당시 일본의 떠오르는 인기 배우였던 시미즈 켄타로, 야쿠자 영화에서 이름을 떨치던 스가와라 분타가 낙점되었다. 과연 이 조합은 성공적이었을까? 영화를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테라야마 슈지는 원래 시나리오를 쓴 이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시나리오를 전면 재수정했다. 일본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문학, 연극, 영화에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한 테라야마 슈지가 제작사의 뜻대로 상업성에 촛점을 두고 썼을까? 천만에, 이 영화는 결코 일본의 록키 영화가 될 운명은 아니었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사고로 남동생을 죽게 만든 텐마의 복싱 스승이 되기로 한 하야토는 열심히 복싱을 가르친다. 그가 텐마의 청을 받아들인 것은 가난하고 신체적인 핸디캡(텐마는 발목에 문제가 있었다)을 가진 텐마가 복싱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열망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의 의미도 찾지 못하고 벽보나 붙이며 살아가던 이 전직 복서는 갑자기 생의 활기를 되찾는다. 이 기이한 관계의 스승과 제자는 차근차근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다. 마침내 텐마가 챔피언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시합의 날이 왔다. 경기 중 텐마의 고질적인 발목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 과연 텐마는 승리할 수 있을까? 하야토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지러움증을 느끼며 텐마의 경기를 지켜본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전형적인 하층민들이다. 싸구려 여관방에서 술에 절어 사는 하야토. 텐마를 응원하는 동네 음식점의 단골들은 또 어떤가? 길거리 매춘부, 담배 피우는 어린 꼬마, 너절한 하류 인생들의 면면들이 모인다. 하야토는 텐마에게 복싱은 증오하는 자만이 하는 것이라면서, 무엇을 미워하느냐고 묻는다. 텐마는 부모와 세상 전부를 증오한다고 말한다. 신체적인 결함을 가진데다,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루저로서 텐마는 자신의 존재를 복싱을 통해 증명하고 싶어한다. 하야토는 그런 텐마와 한 팀이 된다. 테라야마 슈지는 이 기묘한 스승과 제자에게 승리를 안겨줄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유독 특징적으로 보이는 쇼트들은 부감 쇼트이다. 하야토의 방에서 수직으로 높게 내려다 보는 쇼트를 비롯해 등장 인물들은 전지적 존재의 관점에서 압도당하는 보잘 것 없는 약자임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텐마의 스승인 하야토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과거가 있다. 그는 정상의 자리에서 갑자기 시합을 포기한다. 스스로 패배를 선택한 것이다. 텐마는 하야토에게 왜 분명히 이길 수 있었는데 경기를 포기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하야토는 대답 대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일본 복싱 챔피언들의 이름들을 줄줄이 나열한다. 하야토의 삶에는 그 어떤 목적도 없다. 그리고 그가 남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텐마를 가르치는 이유도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텐마가 하야토의 고등학생 딸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음에도 하야토는 텐마를 용인한다. 심지어 복싱으로 최고가 되고 싶다는 텐마조차도 정말 치열한 목적의식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되는대로 사는 진흙탕 속의 삶. 그들은 모두 인생이라는 사각의 링에 갇힌 낙오자들처럼 보인다.
 
  테라야마 슈지는 제작사 도에이에 일본의 록키 영화 대신 테라야마 슈지 표 복싱 영화를 선물했다. 흥행은 실패했다. 강동원의 젊은 시절 미모를 빼닮은 시미즈 켄타로의 인기에 기댔던 제작사는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사실 감독 자신에게도 이 영화는 썩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을 듯하다. 제작사의 상업적 요구와 뭔가 어정쩡하게 타협한 티가 나는 애매한 서사는 실망스럽다. 그럼에도 '복서'에는 테라야마 슈지의 작가적 관점이 드문드문 각인처럼 찍혀있음을 보게 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 가혹한 인생을 복싱의 링에 비유한 테라야마 슈지는 그 갇힌 공간에서 이탈하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하야토의 가출한 딸은 가방을 들고 끝없이 펼쳐진 해변을 걷는다. 시름시름 앓던 하야토의 도베르만은 기력을 찾고서는 주인을 떠나 한없이 기찻길을 따라 간다. 결코 승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루저 인생들에게 이탈과 방랑만이 유일한 삶의 출구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마지못해 제작을 허락했던 도에이의 사장은 분명 후회했겠지만,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 관객은 독특한 복싱 영화를 한 편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 acuview.aucf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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