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2시간 40분, 주요 등장인물 24명,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등장인물들이 한 장소에 다 모이고, 결국 총소리와 노래로 끝이 나는 영화가 있다. 로버트 알트만의 1975년작 '내쉬빌(Nashville)'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다. 미국의 성조기가 전면에 올라가는 가운데 정치적 선전과 구호가 가득한 선거 유세 차량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대안당의 대통령 후보 할 필립 워커의 유세 차량은 영화 내내 내쉬빌을 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정치적 수사를 쏟아낸다. 워커의 정치 모금 행사가 준비중일 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컨트리 음악 가수들의 공연 준비로 떠들썩하다. 이것을 취재하러 온 BBC의 기자 오팔(제랄딘 채플린 분)은 내쉬빌의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인터뷰하기에 바쁘다. 실력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큰 무대에 데뷔하려는 삼류 가수, 남편 몰래 포크락 가수와 바람난 주부, 무작정 내쉬빌에 찾아온 대학생,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에 남편을 버리고 가출한 가수 지망생, 그런 아내를 필사적으로 찾으려는 남편, 아픈 이모 병문안 때문에 내쉬빌에 왔으면서도 죽어가는 이모는 만나지도 않고 남자 꼬시러 다니는 히피,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여자 가수들, 그런 그들 주변의 많은 인물들이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을 펼치는 영화. 정신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들은 어느새 영화의 끝에 다다른다.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The Player, 1992)'를 본 이들이라면 '내쉬빌'의 다층적 서사 방식과 유사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챈다. '플레이어'가 할리우드 영화계의 폐부를 찌르는 이야기라면, '내쉬빌'은 컨트리 음악의 본고장 내쉬빌을 배경으로 1970년대 미국의 정서적 지형을 탐험한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당시 미국의 정치와 연예 산업의 이면을 드러내는 알트만의 영화적 보고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흑인들의 음악인 재즈와 대척점에 서있는 백인들의 음악 컨트리. 알트만은 컨트리 음악이 지향하는 밝고 건강한 미국, 낙관적인 세계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에게 '내쉬빌'에서의 컨트리 음악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실제 컨트리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가스펠과 영화를 위해 작곡된 노래들로 가수들 본인의 곡들이 아니었다. 영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It don't worry me'를 한번 보자. 유명 컨트리 가수 바바라 진은 총을 맞고 쓰러지는데, 모두들 충격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마이크를 넘겨받은 가수지망생(바바라 해리스 분)이 이 노래를 부른다. 구질구질한 현실의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 걱정할 게 없다는 노래 가사는 알트만의 뒤틀린 유머처럼 들린다.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지도 못한 컨트리 가수들도 이 영화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고, 그건 골수 컨트리 음악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알트만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컨트리 음악을 '써먹었다'.

  '내쉬빌'을 통해 알트만이 보여주는 1970년대의 미국은 공허하고 경박스러우며, 혼돈과 무지가 판치는 시대이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당시의 미국에 대해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전적으로 허구적인 인물들과 그 이야기들의 조합인 '내쉬빌'이 가리키는 지점은 미국의 역사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알트만은 영화를 통해 관객들을 그 시대의 분위기와 만나게 만든다. 천문학적인 국방비가 흘러들어갔고 젊은 병사들이 수없이 죽어나갔던 베트남 전쟁이 끝난 때가 1973년이었다. 한쪽에서는 약물에 찌든 히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흑인 인권 운동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평등과 다양성을 요구하는 민권 운동이 폭발했던 시대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한 것이 1974년,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다. '내쉬빌'에서 선거 유세 차량의 정치적 구호들이 기만적이고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아마도 미국민들은 케네디의 암살 이후로 그 어떤 희망의 정치에 대한 기대를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골수 케네디 지지자를 자처한 인물 레이디 펄은 케네디야말로 '진짜'였다고 말한다.

  이 영화 속 인물들 가운데 진정성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속물적이고 자의식 과잉의 BBC 기자 오팔이 내쉬빌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것은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일 뿐이다. 후원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컨트리 가수 데뷔를 꿈꾸는 여자에게 스트립쇼를 강요하는 파렴치한 선거자금 모금책도 있다. 바람둥이 포크락 가수(키스 캐러딘 분)는 밀회 상대자인 여자가 아직 호텔방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여자 친구에게 보고 싶다며 전화를 건다. 너절하기 짝이 없는 인간군상들이 보여주는 이 욕망의 변주들을 알트만은 아주 조화롭게 연주해낸다. 그는 '내쉬빌'에서 어떤 면에서는 신과 같다. 그 많은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알트만은 배우들에게 상당부분 즉흥적인 대사를 허용했다), 흩어지고 조각난 이야기들을 하나씩 맞추어 영화의 마지막에 한 장소에 그러모은다. 그리고 이 놀라운 영화의 신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며 끝낸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가 끝난 후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알트만은 '내쉬빌'의 신이었다."

  이 영화는 1992년에 '미국 국립영화등기부(National Film Registry; NFR)'가 선정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영구적으로 보존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영화 작품으로 뽑힌 것이다. 만약에 누군가 이 영화로 1970년대의 미국 역사에 대해 알려고 한다면, 차라리 미국 현대사에 대한 책 한 권을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쉬빌'에서 관객은 오로지 그 시대의 분위기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온갖 혼돈과 무질서와 불신이 팽배한 괴물같은 시대. 알트만은 그러한 1970년대의 한복판에서 조롱과 야유를 보낸다. 관객들은 '내쉬빌'이라는 만화경을 통해 그것을 관찰한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러한 괴물같은 시대가 만들어낸 '걸작'인 셈이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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