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전 상서(上書)'

  칠흑같은 새벽에 도서관으로 나온 남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만년필을 꺼내 고향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고리대금업자를 동생이 흠씬 두들겨 패고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적 드라마인가? 1987년 MBC에서 방영된 김수현 극본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초반부 이야기다. 시청률이 무려 70%를 넘었던, 드라마 작가 김수현에게는 경력의 최전성기를 열어준 작품이다. 이 34년 전 드라마를 KTV에서 다시 틀어주고 있다. 그 시절에 이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던 이들에게는 꽤나 반가운 일이다.

  드라마는 춘천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방앗간 집 아들 태준과 태수, 사진집 딸 미자, 그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그려낸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는 이 드라마는 억척스러운 어머니(김용림 분) 밑에서 자란 상반된 성격의 두 형제가 중심인물이다. 태준(남성훈 분)은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로 성공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실현해 나간다. 가난한 집안 환경을 딛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 사법고시에 합격하지만 법조계가 아닌 회사에 취직해서 기업인의 길을 걷는다. 태수(이덕화 분)는 불같은 성미로 배운 것은 없지만 강한 의지와 돈에 대한 타고난 감각으로 자신의 사업을 일군다. 태준이 사랑하는 여자 미자(차화연 분)는 단신으로 상경해서 여배우로 명성을 얻지만, 태준 어머니의 반대로 두 사람의 사랑은 헤어짐과 만남을 이어간다. 결국 태준과 결혼하게 되지만, 일 중독인 태준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우울증과 알콜 중독에 시달린다. 이들의 얽히고 설킨 사랑과 야망의 대서사시가 대략 이 드라마의 줄거리가 되겠다.

  이 드라마를 오랜만에 다시 TV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반가움이었다. 그 시절, 이 드라마는 중장년층에게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회고하게 만들면서, 강렬하게 대비되는 캐릭터들과 흡인력 있는 서사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매체의 볼거리가 있는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시청률 70%대는 거저 나온 것이 아니다. 34년이나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이 드라마를 보아도 인물과 대사, 이야기들이 나름대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그 당시의 시청자들이 볼 게 없어서 그 드라마 나오는 시간에 TV 앞에 앉아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가난한 하층 계급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성공 서사를 써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창 경제 개발의 호황기에 접어든 중산층은 드라마 속에서 자신들의 과거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특히 태수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성공기는 굴곡있는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조망하게 해준다. 아무 가진 것도 없는 인물이 어려움 속에서 맨손으로 일구어낸 기업의 과거에는 1970년대의 석유 파동(Oil Shock)이 있는가 하면, 건설 산업 붐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태준이 보여주는 엘리트 기업인의 서사에는 그 어떤 집안의 뒷받침없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얻어낸 성공이 그려진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의미의 '개룡남'의 선구적 캐릭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의 계층 상승은 자신의 노력과 약간의 운을 필요로 하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였다.

  남성 시청자들에게 태준 태수 형제의 서사가 흥미있게 느껴졌다면, 여성 시청자들에게는 '미자'라는 캐릭터가 있었다. 사진집 딸로 알콜 중독자 아버지에게 구박덩이 취급을 받던 미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며 인기 여배우라는 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이 또한 당시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인 성공의 서사였다. 그러나 직업적 의미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준과의 순탄치 않은 사랑, 결혼 이후 불거진 갈등과 증오, 그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적인 공허와 우울에 시달리는 미자는 화려한 성공 서사의 이면을 보여준다. 미자처럼 가부장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여성 캐릭터는 태수의 첫번째 부인 '정자'라고 할 수 있다. 전당포 집 딸로 태수를 쫓아다니며 자신의 사랑을 쟁취한 정자는 결국 태수의 외면으로 이혼에 이른다. 아이 둘을 놔두고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려 했던 정자에게 두번째 결혼은 삶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그들과 대비되는 여성 캐릭터들로는 태준 태수 형제의 여동생 선희(임예진 분)와 태수의 두번째 부인 은환(김청 분)이 있다. 선희는 차분하고 심지깊은 성격으로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가며, 결코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가족의 뜻에 거스르는 법이 없다. 태준의 친구인 홍조와 결혼 생활을 순탄하게 이어가는듯 보이지만, 선희라고 마음의 괴로움이 없을까? 미자에 대한 연민과 애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편의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사느라 속이 타들어간다. 과수원집 딸 은환은 좋아하는 태수와 결국 결혼에 이르지만, 전처 소생의 자식들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심지어 은환은 의붓 자식들 잘 키우기 위해 아이 갖는 것도 포기한다. 이런 인내와 희생의 여성 캐릭터들은 어쨌든 가부장제 하에서 보호받고, 그나마 덜 고통받는다. 

  이 드라마의 놀라운 점은 결말에 있었다. 태준은 기업의 회장으로부터 차기 후계자로 지명되는데, 이를 두고 미자는 일과 성공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야망으로 질주하는 태준을 비아냥 거린다. 그런 미자에게 태준이 주먹을 날리는 것이 이 드라마의 결말이었다. 쓰러지는 미자의 모습이 잡힌 정지화면에서 끝나는 이 결말은 당시로서는 정말이지 파격적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아니, 도대체 이게 뭐야?'하는 탄식을 했을 것이다. 그 장면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태준과 미자의 애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너무나도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복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김수현은 2006년에 리메이크 드라마로 '사랑과 야망'을 다시 선보였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도 원작에 미치지 못했고, 원작에서 수정되고 덧붙여진 이야기들은 아귀가 맞지 않고 너덜거렸다. 무엇보다 리메이크 드라마의 실패는 이전과 달리 '시대가 변했다'는 데에 있었다. 2006년의 시청자들은 1987년의 시청자들이 아니었다. 리메이크 드라마는 마치 김빠진 맥주처럼 외면당했다. 오래전 원작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리메이크작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1987년의 드라마를 자동재생시켰을 것이다.

  이 드라마로 배우 경력의 정점에 오른 차화연은 이듬해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났다. 은환 역의 김청은 청순하고 순종적인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 홍조의 여동생 역으로 나온 김도연은 귀엽고 발랄한 이미지로 자신의 얼굴을 알렸다. 그리고 이 드라마로 성공적으로 안방 극장에 복귀한 배우가 하나 있다. '윤여정'이다. 미자의 후원자인 패션 디자이너 역으로 나온 윤여정은 조영남과 이혼한 직후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오랜 미국 생활을 끝내고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려고 고군분투했던 윤여정에게 이 역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중요한 기회였다. 김수현과 오랜 친구 사이로 윤여정은 이후로도 김수현 드라마에서 고정적인 배역을 맡았다. 이후에 이어진 너무 많은 드라마 출연으로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지는 윤여정의 연기는 '사랑과 야망'에서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준다. 큰 인기로 온갖 화제를 몰고 다녔던 전설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은 KTV에서 평일 저녁 9시에 방영된다.  



*사진 출처: ksilbo.co.kr  미자 역의 차화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