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한직업(2019)'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사는 치킨집 주인의 이 말이었다.

  "아, 아메리칸 스타일?"

  잠복근무를 위한 치킨집을 인수하는 자리에서 형사들은 위장한 자신들의 신분을 소개하는데 서로 말이 엉킨다. 남편 두 명과 아내 한 명. 하는 수 없이 전 남편과 현재 남편으로 소개하자, 치킨집 주인이 이것이 아메리칸 스타일이냐며 놀라워한다. 허버트 로스 감독의 1977년 영화 '굿바이 걸(The Goodbye Girl)'을 보면서 나에게 떠오른 단어는 바로 그 '아메리칸 스타일'이었다. 미국의 유명 희곡 작가 닐 사이먼이 시나리오를 쓴 이 영화는 싱글맘의 사랑 찾기를 '미국식'으로 담아낸다.

  폴라(마샤 메이슨 분)는 서른 셋의 전직 댄서 출신으로 10살된 딸 루시(퀸 커밍스 분)와 함께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동거하던 배우 남자 친구가 쪽지 한장 던져놓고 떠나버리자 폴라는 속상해 하고, 딸 루시는 그런 엄마를 따뜻하게 위로한다. 그런데 남자는 떠나면서 살던 아파트를 자신의 친구에게 세를 내주고 가버린다. 졸지에 집을 비워줘야 하는 처지의 폴라 모녀에게 찾아온 엘리엇(리처드 드라이퍼스 분)은 당분간 함께 살아가자고 제안한다. 서로 맞지 않는 생활 방식 때문에 티격태격하던 폴라와 엘리엇은 조금씩 친해진다. 엘리엇은 어렵게 따낸 셰익스피어 연극 '리처드 3세'의 배역을 제대로 해내고 싶어하지만, 맘에 맞지 않는 연출가 때문에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한편 폴라는 나이든 댄서로서 일자리를 얻기 힘든 자신의 처지에 좌절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위로하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 루시도 엘리엇에게 호감을 가지고 잘 따르게 된다. 과연 싱글맘 폴라의 사랑찾기는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간다. 무엇보다 영화를 빛나게 해주는 것은 서로 좋은 케미를 보여주는 세 배우들의 연기다. 루시 역의 퀸 커밍스는 철없는 엄마와 부대끼며 사느라 일찍 철들어 버린 애어른 역을 깜찍하게 해낸다. 폴라 역의 마샤 메이슨은 당시 남편이었던 닐 사이먼의 창작 의도를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그리고 리처드 드라이퍼스.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엄청난 대사들을 그처럼 찰지고 재미있게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자세히 들어보면 단어 하나하나 발음이 뭉개지거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감수성 풍부하고 자존심 강한 연극 배우 역을 진지하고도 코믹하게 잘 연기한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서른 살의 나이였던 그는 아카데미 최연소 남우 주연상 수상이라는 기록을 갖게 된다. 2003년에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의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그 기록을 깨뜨리는 데에는 25년이나 걸렸다.    
 
  아주 잘 만든, 재미난 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굿바이 걸'에 흐르는 정서는 지극히 미국적이다. 딸을 데리고 사는 싱글맘이 남자 친구와 동거하며 사는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 나라 관객은 과연 얼마나 될까? 영화 속에서 폴라가 하는 고백들을 듣다 보면, 이전에도 남자들에게 배반 당하고 남겨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딸 루시가 그런 엄마를 오히려 위로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도 이해가 간다. 엄마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이 미국의 싱글맘 폴라는 남자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제 폴라의 남자가 된 엘리엇은 루시에게 이렇게 묻는다.

  "오늘 밤에 서로 방을 바꾸게 될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네 엄마 방으로 옮겨갈 거야. 루시, 네 생각은 어떠니?"

  정신없이 돌아가는 두 사람의 사랑에 얼떨떨해진 2021년의 한국의 관객과는 상관없이 루시는 쿨하게 좋다고 대답한다. 이것이야말로 '찐 아메리카 스타일'인 모양이다. 루시의 유일한 걱정이라면 엄마가 엘리엇에게 나중에 또 딱지맞고 속상해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꼬마 루시도 역시 아메리칸 키드임에 분명하다. 내가 후진 구시대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이 영화 속의 미국 사람들과 나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을 뿐이다. 닐 사이먼은 진짜 미국인의 정서와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을 그려낸 희곡,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의 작품 속 대사들은 매우 직관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인물들 내면의 심리적 갈등과 그 깊이를 드러내는 데에는 역부족인 느낌을 준다. 그 때문에 그는 대중적인 인기는 많이 얻었지만, 평단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비록 아메리칸 스타일을 좀 이해하지 못한들 어떠하랴. 허버트 로스가 보여주는 밝고 희망적인 이 로맨틱 코미디는 마음 칙칙한 어느 날의 영화로 아주 잘 어울린다. 글을 마치기 전에 '굿바이 걸'의 현실 후일담을 말하자면 이렇다. 이 영화로 젊은 나이에 얻게 된 큰 영예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리처드 드라이퍼스는 한동안 마약 문제로 고생하다 재활 치료를 받고 '잠복근무(Stakeout, 1987)'로 재기할 수 있었다. 영화 촬영 당시 닐 사이먼의 아내였던 마샤 메이슨은 그와 여러 작품을 함께 하다 이혼했다. 영민하고 깜찍한 딸 루시를 연기한 퀸 커밍스는 연기 경력을 그리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연기에 재능이 있었음에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세 명의 배우들이 가장 빛나고 좋았을 때 만든 영화 '굿바이 걸'은 40년도 더 된 영화임에도 녹슬지 않은 재미를 선사한다.  



*사진 출처: oscarcham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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