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여배우 머틀은 오랜만에 연극 공연의 배역을 맡았다. 시범 공연을 끝내고 나오던 비오는 날 밤, 십대 여학생 팬이 사인 요청을 하고 머틀은 흔쾌히 수락한다. 머틀은 곧 차에 타고 떠나려는데 그 여학생이 길에서 차 사고를 죽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사건 이후, 머틀은 제대로 연기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 때문에 연극의 연출가, 극작가, 제작자가 나서서 머틀을 어떻게든 도우려 하는데, 머틀의 상태는 갈수록 엉망이 된다. 마침내 연극이 정식 상연되는 오프닝 나이트 날, 주연 배우인 머틀은 공연 시작 전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공연, 시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연출가 메니(벤 가자라 분): 난 어떻게든 이 연극을 무대에 올려야 해. 골칫덩이 머틀이 말만 잘 들어주면 좋을 텐데...

  그냥 열성팬 여자애 사고로 죽은 일 가지고 왜 저러나 몰라. 원래 배우라는 인간들이 제멋대로인 건 잘 알고 있지만 말이야. 새벽 4시에 불안하다고 전화를 하지 않나, 마누라가 눈총 주는 것도 참아가며 징징거리는 소리 들어주었다구. 그렇지 않아도 마누라가 머틀하고 내가 무슨 사이가 아닌가 싶어서 잔뜩 신경 곤두서 있어.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도 못하고 자기가 만들어 내질 않나, 힘들다고 술 퍼마시고, 도대체 머틀 쟤를 어떻게 하면 좋냐고. 프로의 세계에서 저런 모습을 보게 되다니, 내가 연극학과 학생하고 공연하는 건가? 진짜 돌아버리겠네...

극작가 사라(조안 블론델 분): 저 정신나간 여배우가 내 연극을 망치고 있어. 늙은 여자 배역이 싫다니, 자기 나이도 인정 못하고 정말 한심하네...

  작가가 목숨 걸고 쓴 대본이 우스운가 보네. 지 멋대로 대사를 바꾸다니. 자기는 폐경기 여자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길래, 나이를 물었어. 대답을 못해. 내가 보기엔 몇년 있으면 그렇게 되겠구먼. 늙은 여자 역을 잘 해내면 진짜 늙어버릴 것 같대. 말이 되는 소리야? 대체 배우를 왜 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 사건 이후로 상태가 많이 안좋길래 귀신이라도 씌운 거 아닌가 싶었지. 아는 영매(靈媒)에게 데려가기까지 했는데 그냥 나와버리는 거야. 그러더니 한밤중에 내 집에 찾아와서 얼굴을 짓찧고 난리를 치더군. 진짜 미친 거야. 내가 이제까지 쌓아온 명성이 저 미친 여자 때문에 무너져버릴 것 같아. 이걸 어쩌면 좋냐구...

배우 모리스(존 카사베츠 분): 이 공연을 잘 해내고 싶어. 그런데 머틀이 계속 문제를 만들고 있어.

  그냥 난 연기에만 몰두하고 싶을 뿐이야.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왜 자꾸 개인적인 감정으로 무대를 엉망으로 만드냐구. 뺨 때리는 연기가 기분이 나쁜지 나를 후려치고, 뺨 맞고 쓰러져서 난리를 쳐. 대본에 있는 걸 어쩌란 말이야. 여자애 죽는 걸 보고나서는 충격을 받은 것 같기는 해. 내가 뭐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술 취해 나한테 찾아와서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데 이게 뭔가 싶네.

연출가 메니의 부인(조라 램퍼트 분): 남편 연극이 잘 되어야 할 텐데, 여배우가 속을 어지간히 썩이는 모양이네.

  새벽 4시에 전화하는 거 보고 좀 신경이 쓰이기는 했어. 저 세계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하긴 1년 전에 19살짜리 계집애하고 바람난 남편이란 인간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 싹싹 빌고 용서해달라길래 하는 수 없이 받아주기는 했지만 말야. 극장에 가서 볼 때마다 남편에게 허물없이 친하게 굴더군. 어휴, 그냥 공연 끝날 때까지만 내가 참자. 메니도 연극 때문에 잘해주고 그러는 거겠지. 근데, 어째 저 여자, 많이 불안해 보여. 저 상태로 간다면 연극이 제대로 올라갈지나 모르겠네.

여배우 머틀(지나 롤랜즈 분): 난 늙지 않았어. 왜 이딴 배역을 내가 연기해야되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어떻게든 잘 해내려고 하는 내 맘을 아무도 몰라줘.

  죽은 여자애 장례식에 갔었어. 그 아버지가 나한테 그러더군. 아이가 있다면 여기 올 생각을 못했을 거라고. 그래. 난 결혼도 안했고, 아이도 없지. 17살 때부터 연기로 살아온 인생이야. 난 아직도 내가 젊고 괜찮다고 생각해. 그런데 늙은 극작가 여편네가 쓴 자기 이야기를 내가 연기해야 되는 거야. 이걸 내가 하는 게 맞는 걸까? 난 프로니까 어떻게든 해낼 거야. 내 방식대로 연기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인데, 메니는 날 다그치기만 해. 왜 그걸 이해해 주지 못하냐고. 그렇지 않아도 죽은 여자애가 나타나서 날 괴롭히고 있어. 진짜 걔한테 맞았다니까. 무섭고 놀라서 집에서 뛰쳐나왔어. 결국 극작가 할망구가 소개해준 영매 찾아가서 그 애를 불러낼 수 있었어. 또 나를 때리길래 나도 죽기살기로 덤벼들었지. 이 연극, 그냥 그만두고 싶다.

       
  존 카사베츠의 1977년작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는 연극 공연을 하게 된 여배우의 심리적 혼란과 두려움을 담아낸다. 이 영화에서는 'The Second Woman'이라는 연극이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이런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극중극(劇中劇)의 형식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엇이 '진짜 자신'인가를 찾아나간다.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카사베츠가 공포 영화의 장르적 속성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여배우 머틀이 목격한 죽은 십대 팬 낸시는 어떤 혼령이나 기운의 형태가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로 머틀에게 나타난다. 이 영화를 별다른 생각없이 보고 있던 관객들에게 그렇게 등장하는 낸시는 갑자기 '훅'치고 들어오는 주먹처럼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공포 영화, 심령 스릴러의 장르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여러 다양한 이야기의 얼개가 겹쳐있다. 중년 여배우가 겪는 심리적인 어려움, 연기와 경력에 대한 강박, 그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쇼 비지니스 세계의 면면들, 이런 것들이 아주 흥미있게 펼쳐진다. 러닝타임 2시간 24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지는 속도감과 짜임새 있는 이야기 전개, 그리고 주연 배우 지나 롤랜즈의 경이로운 연기가 이 영화를 놓칠 수 없는 명작의 반열로 밀어올린다. 카사베츠는 'Faces(1968)', 'The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이전에 감상한 두 작품 보다 이 영화가 그의 진정한 걸작이라고 느낀다. 카사베츠도 그 스스로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아내이자 예술적 동반자이기도 했던 지나 롤랜즈의 눈부신 연기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지나 롤랜즈에게 베를린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사진 출처: filmkuratorium.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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