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만든 감독이 들을 수 있는 심한 혹평이 있다면 무슨 말일까? 아마도 다큐를 본 관객의 다음과 같은 말이 아닐까?


  "일기는 일기장에."


  자기 자신,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 사적 다큐는 어쩌면 다큐 제작자에게 가장 편하고 만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의 이야기가 사회와 만나는 접점이 없고, 단순히 흥미있는 이야기이거나 그저 고통스러운 자기 고백이라면 다큐가 아니라 '영상 일기장'이 되는 일은 흔하다. 그러므로 사적 다큐를 만드는 이들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확장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Gallivant(1996)'를 만든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앤드류 쾨팅은 그런 지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쾨팅은 쥬버트 증후군(Joubert Syndrome)을 가진 어린 딸 이든과 자신의 노모 글래디스의 여행기를 이 다큐에 담아냈다. 염색체 이상으로 뇌와 신체의 기능을 비롯해 언어 능력에 장애를 가진 이든은 자신의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응'과 '아냐' 정도가 이든이 할 수 있는 말이다. 할머니 글래디스는 끊임없이 이든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이든이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여행하는 동안 글래디스는 이든의 손짓과 감탄사, 얼굴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이든의 표현법을 터득해 나간다. 그렇게 할머니와 손녀는 조금씩 친밀감을 쌓아가게 된다.


  'Gallivant'의 기본적 이야기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할머니와 손녀가 따뜻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거기에 감독이자 글래디스의 아들, 이든의 아버지로서 쾨팅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다큐 내내 부각시킨다. 관객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든의 손짓과 감탄사가 가진 의미를 아버지 쾨팅은 알고 있다. 이든이 언덕 위에 자리한 거대한 성채 앞에서 무언가 표현을 하는데, 쾨팅은 기가 막히게 딸의 마음 속 언어를 알아채서 자막으로 보여준다. 정말로 그가 장애를 가진 딸 이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절절한 깊이를 가늠케 한다. 웨일즈에서 스코틀랜드, 영국의 동남부 해안에 이르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여행하면서 그렇게 이 세 명의 가족은 서로 더 가까워진다.


  그런데 그 과정을 담아내는 쾨팅의 서사 방식은 결코 단순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빠르게 배속 편집된 화면이 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물들의 말은 제대로 잘 들리지 않으며 장면들을 따라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뉴스 릴(news reel)과 여러 자료 화면, 라디오 방송, 수화로 제작된 교육용 화면, 쾨팅과 제작진이 분장하고 찍은 장면들이 뜬금없이 튀어나오며 관객의 집중력을 시험한다. 마치 실험 영화를 찍듯 개연성 없는 극도의 클로즈업, 여행지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던지는 별 의미없는 쾨팅의 질문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음악(로만 폴란스키의 1966년 영화 'Cul-de-sac'의 음악을 차용했다)은 일반적인 여행기의 서사에서 벗어나 있다.


  여행지의 풍광도 평화로움이나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해변가에 위치한 의류 공장에서는 거품이 가득한 폐수가 쏟아지며, 'Clootywell'이라는 마을에서는 온갖 종류의 속옷이 나무에 걸려있는 기이한 광경과 마주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소원을 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성황당 당산나무에 묶어놓은 색색의 헝겊들을 생각하면 될듯 하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여행하면서 보고 만난 1995년의 영국과 영국인의 모습이다'라고 쾨팅은 선언하는 것 같다. 다소 낙후된 영국 북부를 비롯해 소도시 사람들은 생기가 없고, 정부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는다. 그런가 하면 시골 마을에서의 전통춤과 마을 주민의 하모니카 연주도 나름의 볼거리로 들어 있다. 그저 되는대로 찍은 것처럼 보이는 혼란스러운 가족 여행기는 외부 세계와 사람들로 그 방향을 넓혀 간다.  

  

  그렇게 'Gallivant'는 가족 일기장의 한계를 넘어서 사회적 접점을 만들고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다. 보기 편한, 감동이 가득한 다큐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큐를 전공하거나 제작하려는 이들의 필수 감상 목록에는 들어가겠지만, 일반 관객들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를 보는 일은 오래된, 그렇지만 아주 새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어떤 무언가와 만나는 일이다. 앤드류 쾨팅은 별 의미없이 돌아다니며(gallivant) 자신이 만난 영국인들과 그들의 삶의 단편들을 보여준다. 그는 사적 다큐가 가진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어서 온갖 영화적 실험이 가득한 자국 문화 탐방기를 만들어 냈다.


  "난 이든과 함께 지낸 매순간을 즐겼어. 그러니까 그 말은... 이 아이와 내가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이겠지."


  생의 황혼의 시간에 서있는 노모에게는 손녀딸과의 살가운 시간을, 딸 이든에게는 가족 여행의 추억을, 쾨팅 자신은 새로운 영화적 탐험을 하면서 그 시대의 영국을 담아낸 작품. 'Gallivant'는 그런 다큐이다.



*사진 출처: tainiothiki.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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