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죽기 전에 꼭 1001가지 시리즈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이언 헤이든 스미스 책임편집, 정지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만한 책이 뭐 없나 책장을 살펴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동생이 사서 보내준 책인데, 비닐 포장도 안뜯고 6년째 책장 안쪽에 처박혀 있었다. 왜 안보고 그렇게 놔두었을까? 거의 10년 가까이 영화를 안봤다. 영화라면 지겹고 신물이 났던 것도 같다.


  포장을 뜯고서 안쪽에 발행 년도를 보니 2014년. 책이 나오고 4판까지 찍어냈으니, 이 책은 꽤나 잘 팔린 책 같다. 이 판본 이후로도 2번이나 증보판이 나온 것을 봐도 그렇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아무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영화 제목만 보는 데에 2시간이 좀 넘게 걸린 것 같다. 내가 보았던 그 많은 영화들에 대한 추억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책은 어쩌면 내 젊은 날을 삼켰던 무수한 영화들의 목록인지도 모르겠다.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 '인톨러런스(1916)'를 지금의 나에게 다시 보라고 하면 못볼 것 같다. 전공이었고, 내가 정말로 영화를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열정을 가지고 보았었다. 책에 나온 그 많은 영화들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봤을까 싶기도 하다. 시간과 노력과 청춘의 시간들이 그 영화들과 함께 흘러갔다.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한 훈련을 받은 셈이었다. 굳이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아야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까... 어쨌든 이 책에 나온 영화들은 꽤 괜찮은 길잡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에 언급된 영화들은 대부분 미국 영화들이다. 세계 영화사는 어떤 면에서는 미국 영화사이기도 하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이 책의 편집자들도 대부분 미국의 학자들이므로 그런 시각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유럽 영화사는 좀 쳐주기는 했다. 일본과 대만 영화들도 부록처럼 들어가 있다. 한국 영화는 단 두 편이다. '하녀(1960)'와 '올드보이(2003)'. 새롭게 증보판을 낸다면 '기생충(2019)'이 들어가겠지. 이 책이 미국과 유럽 위주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내 영화 공부의 많은 부분을 EBS에 빚졌다는 사실이다. 초창기 헐리우드 흑백 영화들, 다양한 유럽 예술 영화들을 EBS에서 만났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책에 나온 켄 러셀의 '악령들(The Devils, 1971)'을 EBS '세계의 명화'에서 봤다. 물론 지금의 EBS의 영화 선정 안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쩌다가 '세계의 명화'가 망해가는 동네 비디오 가게처럼 되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앉아서 2시간 넘게 영화 제목을 들여다 보고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로소, 오래전에 본 영화들과 함께 젊은 날의 시간들은 온데간데없고 나이든 영화광이 서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나에게 대체 뭐였을까? 그 해답을 아직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책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 '올드 보이'가 나온 페이지는 900인데 뒷편의 색인에는 898쪽으로 나와있다. 단 2편의 한국 영화를 올리면서 쪽수까지 틀렸다.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겠지. 한국 영화가 아무리 성장했다 하더라도, 미국과 서구 유럽의 영화 학자들 시각에서는 아직도 비주류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좀 컸네, 그래 끼워주지, 하는 느낌이랄까. 이제 영화는 산업의 영역에 종속되었고, 그걸 예술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되는 영화를 찍는 것이 영화인들에게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매혹시키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젊은 날을 앞다투어 내던지게 만드는 이 요망한 영화의 알 수 없는 마력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영화와 함께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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