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이 돈에 미친 것 같아요. 오늘 보니 사무실 사람들 점심 먹고 죄다 스마트폰으로 주식 시황 보고 있더라구요. 직원 하나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해서 대출을 받았는데, 마침 20년된 아파트 매물 나온 거 본다고 점심도 못먹고 나갔다 왔어요."


  얼마 전, 가끔 들르는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읽었다. 주식과 집값 이야기 빼면 요새 웬만한 사이트 게시판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52년 영화 '번개(Lightning)'를 보면서, 문득 그 게시판 글을 떠올렸다. 그의 영화 가운데 이토록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온 영화가 있었던가 생각해 보았다. 없었던 것 같다. '번개'의 인물들은 시종일관 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야기한다.


  각기 다른 아버지를 둔 네 명의 남매. 첫째 누이코는 탐욕스럽고 제멋대로이며, 둘째 미츠코는 착하지만 유약하다. 셋째 가스케는 파친코로 소일하는 실업자, 넷째 기요코는 관광 버스 가이드로 그 세 명과는 달리 가장 성실하고 강단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누이코가 돈푼 꽤나 있는 빵집 주인을 기요코의 신랑감으로 소개하면서부터 그렇지 않아도 번잡스러운 집안이 더 시끄러워진다. 기요코는 남자의 됨됨이가 영 마뜩지 않은데, 돈이 궁한 누이코는 어떻게 해서라도 혼사를 맺게 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 둘째 미츠코는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데,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 남편의 내연녀의 돈 요구에 아연실색한다. 미츠코가 받게 되는 남편의 보험금에 눈독을 들이는 또 다른 사람으로는 언니와 남동생이 있다. 돈벌이가 시원찮은 남편을 팽개치고, 결국 빵집 주인과 눈맞아 살림차린 첫째. 딸에게 버림받은 사위를 어쩔 수 없이 거두는 기요코의 어머니.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진 기요코는 시 외곽에 하숙을 얻는다. 이 바람 잘 날 없는 집구석에 평화라는 것이 오기는 올까...


  '번개'를 보는 내내 나는 'こんじょう(根性)'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흔히 하는 말로 '곤조'는 '더러운 성질머리'로 쓰이지만, 원래의 뜻은 '타고난 성격', '성깔'의 의미이다. 아버지가 각자 다른 네 명의 아이를 키운 여자로서 기요코 엄마의 삶도 참 기구하다 싶기도 하다. 네 명의 자식들은 성깔도 제각각이다. 뭐랄까, 그 자식들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아버지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첫째 누이코의 극성스럽고 뻔뻔한 모습, 둘째의 착하지만 근기없는 유약함, 셋째의 게으르고 대책없는 삶, 막내 기요코의 올곧은 품성과 따뜻한 마음. 그것이 그들이 타고난 삶의 조건이다. 그런 바탕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닥치는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렇게 제각각의 성격을 타고난 네 명의 동기간에게 '돈'이란 화두를 툭, 하고 던져주는 것 같다. 그리고 나서 그 인물들의 성깔이 어떻게 삶 속에 들어온 돈을 바라보고 풀어내는지 보여준다. 어떤 것이 더 나은지 정답은 없다. 삶의 방식은 다 다른 것이므로. 그렇게 삶을 휘젓는 그 '돈' 앞에서 고요함과 평화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기요코는 호젓한 시 외곽의 하숙집에서 비로소 앞날의 희망과 마음의 평안을 느끼지만, 갑자기 찾아온 엄마의 방문은 그 모든 것을 일순 흔든다. 마치 기요코가 엄마와 언쟁을 한 후 창 밖으로 보게되는 번개처럼.


  "왜 날 낳았어요? 엄만 애정도 없이 우릴 막 낳은 거죠? 마치 고양이 같아요. 살아가면서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퍼붓는 딸의 언사에 속이 상한 엄마는 흐느껴 운다. 결국 마음을 고쳐먹은 기요코는 엄마를 다시 따뜻하게 위로하고 그 두 사람은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집을 나선다. 그 마지막 장면은 진정한 화해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어설픈 봉합이며, 일시적인 멈춤과도 같다. 기요코의 동기들과 엄마는 여전히 돈에 목매는 삶을 살아갈 것이며, 그 분란에서 기요코는 결코 외따로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요코가 꿈꾸는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하숙집 남매가 보여주지만, 그것에 기요코가 도달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기요코가 관광 버스 가이드로서 늘 아름다운 도시의 풍광을 기계적으로 소개할 뿐, 그 풍광을 마음 편히 감상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에서 기요코의 표정에는 자신감과 안정감이 묻어나온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모두 다 바꿀 수 는 없지만,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미래에 대해서 만큼은 우직한 걸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요코의 타고난 천성이다. 기요코는 자신의 아버지가 엄마에게 주었다는 루비 반지가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진짜였다.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기요코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네 아버지는 거짓말을 모르시는 양반이었어."


  올곧고 성실한 성품을 지닌 아버지의 딸로서 기요코는 자신의 삶에 닥치는 어려움을 그만의 방식대로 헤쳐나갈 것이다. 느닷없이 내리꽂히는 삶의 번개는 어찌할 수 없지만, 그것은 순간이며 삶은 어떻게든 이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지만, 결코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영화 '번개'는 그렇게 너저분한 삶의 풍광 속에서도 존재하는 한 줄기 희망을 이야기 한다.


 

*사진 출처: avoir-ali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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