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니야."


  모니카(한예리 분)는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 분)에게 그렇게 불만을 표현한다. 사방이 드넓은 풀밭인 외딴 곳에 덩그라니 있는 이동식 주택은 모니카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그곳은 그렇게 이 부부의 새로운 출발지가 된다. 부부에게는 두 자녀, 첫째 앤(노엘 케이트 조 분)과 둘째 데이비드(앨런 킴 분)가 있다. 남편의 직업은 '병아리 감별사'. 아내도 같이 작업장에서 일한다. 갓 부화한 병아리의 항문의 모양새를 보고 수평아리를 감별해 내는 직업이다. 그 직업군에서 한국인들은 뛰어난 감식안으로 전세계로 진출했다. 제이콥도 그렇게 1970년대에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Minari, 2020)'은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목부터가 눈길을 끈다. 영어의 미나리에 해당하는 'dropwort' 대신에 'minari'라고 썼다. 아마도 감독에게 '미나리'란 식물은 결코 다른 언어로 대체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들어있으며, 그의 외할머니는 한국에서 미나리 씨앗을 미국으로 가져와서 심었다고 한다. '미나리'는 그에게 혈연과의 연결고리가 되며, 그의 근원이 되는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린 아들 데이비드는 심장이 약해서 부부의 근심거리인데, 가뜩이나 병원과 먼 곳의 시골 깡촌에 왔다고 생각하는 모니카는 어떻게든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그곳에 커다란 농장을 일굴 생각이다. 한국인 이민자들을 위한 농산물을 심어서 근처 대도시에 내다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병아리 감별사 일과 병행하는 농장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낮에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다. 모니카는 자신의 어머니(윤여정 분)를 모셔오기로 한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외할머니와 아이들은 잘 지낼 수 있을까? 제이콥의 농장은 과연 잘 되어갈까? 그들 부부가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영화의 대부분은 한국어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 모니카와 제이콥, 모니카의 어머니가 대화를 나눌 때 영어 자막이 화면에 뜬다. 앤과 데이비드는 주로 영어로 대화한다. 영어 대사는 당연히 자막으로 안나온다. 이 영화는 미국 제작사(브래드 피트가 만든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다. 감독도 한국계 미국인, 배우들도 한예리와 윤여정을 빼고 미국 국적이다. 당연히 스탭들도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는 미국의 영화제에서 '외국어 영화'로 분류되고 있어서, 이 부분이 과연 '미국적인' 영화가 무엇이냐에 대한 논란을 낳고 있다. 단지 한국어 대사가 주가 된다고 해서 미국 영화가 아니라고 보는 것에 이민자들, 특히 아시안 이민자들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언어'라는 장벽이 가진 꽤나 견고한 힘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아역 배우들이다. 특히 어린 아들 데이비드로 나온 앨런 킴은 타고난 연기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 아이에게는 현실과 배역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극중에서 미국 태생으로 영어를 모국어로 쓰면서도 이민자 부모의 언어인 한국어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연기가 아주 좋다. 그건 딸 역의 노엘 케이트 조도 마찬가지다. 이 두 아역 배우들을 보는 즐거움은 어쩌면 이 영화의 70프로, 아니 그 이상을 차지한다.


  배우 윤여정이 외할머니 역으로 주요 영화제의 연기상을 휩쓸고 있지만, 어쩐지 내게는 틀에 박힌 연기처럼 보인다. 윤여정은 오랫동안 TV의 일일 드라마, 주말 드라마 등에서 자신의 연기 이력을 이어오면서 그다지 인상적인 면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현지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윤여정의 연기가 다르게 평가받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티븐 연의 연기도 평이하다. 뭔가 연극적인 대사 처리가 드문드문 드러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한예리의 연기는 아주 좋다. 이 영화에서 한예리는 자신의 배우로서의 존재 가치를 명백하게 각인시킨다. 낯선 땅에서 어떻게든 뿌리내리고자 하는 이민자, 두 아이의 엄마로서 불안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매우 잘 소화해냈다.


  '미나리'에서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1980년대 초반을 재현해낸 소품과 미술 세트들이다. 극중에서 모니카는 신실한 크리스찬으로 나오는데, 거실 벽면을 장식한 태피스트리에는 예수님이 보인다. 그 시절의 한국에서 그 자줏빛 태피스트리는 왠만한 집들마다 다 있는 벽장식품이었다. 성서적 내용부터 시작해서, 돈 잘벌게 해달라는 의미의 멧돼지 그림까지 다양한 무늬들이 짜여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 나온 컬러 TV는 대체 얼마만에 보는 것인지, 아니 저런 걸 지금도 소품으로 구할 수 있나 싶어서 놀랐다. 심지어 욕실에 있던 푸른색 '플라스틱 바가지'까지 미술에 신경을 정말 많이 썼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차들도 당연히 그 시대의 차들인데, 굴러가는 것이 신기하게 보일 정도다. 


  극중에서 윤여정은 미나리 씨앗을 한국에서 가져와 집 근처 냇가에 심어놓는다.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힘들게 뿌리내리는 딸과 사위, 손주들의 미래가 어디서든 잘 번성하는 미나리처럼 되어가길 바라는 뜻이다. 미나리는 물이 있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잘 자란다. 물을 정화하는 수생식물의 특성이 있어서, 심지어 공장 폐수가 나오는 곳에서도 자란다. 아마 좀 나이가 있는 세대라면 공장 지대 폐수를 끌어다 미나리를 키워 팔다 적발된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들었을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구."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살자는 아내의 요구에 제이콥은 그렇게 말한다. 그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두 아이들에게 아버지로서 가치있는 무언가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거대한 정원(garden)을 가꾸는 것, 그것은 농작물을 길러내는 농장(farm)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정신적 가치가 들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식물들처럼 이민자들은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때로 그것은 많은 희생을 수반한다.


  제이콥이 일하는 공장 굴뚝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쓸모없다는 이유로 폐기처분되는 수평아리들을 소각하기 때문이다. 그 연기는 낯선 곳에서 자신들의 유용성을 입증해내지 못하면 언제든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이민자들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나리'는 미국으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모든 이민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이삭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그렇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모, 혈연으로 이어진 모국의 근원을 들여다 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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