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남들이 보고 있지 않을 때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어느 인터뷰에서 남겼다는 이 말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아호, 나의 아들(陽光普照, 2019)'에 나오는 아버지 아원에게도 내다 버리고 싶은 가족이 하나 있다. 어려서부터 말썽만 부리고 사고뭉치로 자라난 둘째 아들 '아호'이다. 운전학원의 강사로 일하는 아원은 운전 연수생들이 자녀가 몇이냐고 물으면 하나라고 대답한다. 그에게 자식은 첫째 아들 '아하오' 뿐이다.


  오랜만에 대만 영화를 보았다. 청몽홍 감독은 내게 낯선 이름이다. 오래전에 내가 보았던 대만 영화들은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정전(傳)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차이밍량의 '애정만세(1994)'의 마지막 장면, 여주인공 메이의 긴 울음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구멍(1998)'이 보여준 소외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은 또 어떠한가. 허우샤오센은 '비정성시(1989)'로 유명하지만, 내게는 초기작인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의 장면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 두 감독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챙겨서 보았지만, 나중에 보여준 그들의 영화들은 꽤 실망스러웠다. 대만 영화는 두 감독의 부침(沈)에 따라 쇠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는 대만 영화들을 잊고 있었다.


  '아호, 나의 아들'은 그런 나에게 대만 영화의 저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청몽홍이 보여주는 어느 가족의 초상은 강렬하면서도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영화 도입부의 끔찍한 범죄 장면은 이 감독이 보여주는 영화의 세계가 자신의 선배들과는 남다르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 같다. 영화 중간 중간에도 청몽홍이 다루는 폭력의 이미지가 매우 날것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본다. 그런 것을 보면 이 감독에게는 매우 거친 야생성 같은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영화 전체를 통해서 청몽홍이 보여주는 인물의 내면 묘사와 연출 방식은 매우 섬세하다. 그 점이 러닝 타임 2시간 35분을 무리없이 이어가는 원동력이다.


  둘째 아들 아호는 자신을 괴롭힌 '오뎅'에게 저지른 폭력 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다. 거기에는 아호의 친구 '무'도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 아원은 법정에서 판사에게 아들을 감옥에 가두어서 정신차리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원의 희망은 의대 진학을 목표로 재수 중인 첫째 아들에게만 있다. 첫째 아하오는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온종일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으로 인식한다. 영화 제목 '陽光普照(양광보조, 영어 제목은 'A Sun'이다)'는 '두루 내리 비치는 태양빛'이란 뜻이다. 


  첫째에게만 쏟아지는 햇빛, 둘째인 아호는 어둠 속에 서있다. 이 가족의 비극은 그렇게 양분된 빛과 어둠에서 기인한다. 아버지는 운전 학원 강사로, 엄마는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의 미용일을 하며 아이들을 어렵게 키웠지만, 그 부부는 자신들에게 닥친 예기치 못한 비극을 목도한다. 아원에게는 운전 연수생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대로 결국 한 명의 아들만 남는다. 그런데 그 아들 아호는 출소 후에 친구 '무'의 겁박에 못이겨 범죄에 가담하게 된다. 


  "순간을 잡고 길을 정하라"


  그 말은 아원의 인생 좌우명인 동시에 직장인 운전 학원의 야외 연습장에 크게 써져있는 말이다. 아원은 모범적인 도로 주행을 하는 운전자처럼 성실히 살아왔다고 믿지만, 그에게 닥친 가족의 현실은 고통과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그에게 아내마저 비난을 더한다. 당신이 아이들을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해주었냐고...


  영화의 결말부. 아원은 아내에게 자신이 하나 남은 아들 아호를 위해 감내했던 일에 대해 털어놓는다. 아내는 남편이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에 절규한다.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이 보여주는 응축된 감정의 분출은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나는 아내가 남편의 비밀을 알고 오열하는 장면에서 바닥에 주저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몽홍의 연출은 결코 지나침이 없다. 아내는 무너지지 않고, 남편을 감싸 안는다. 부부라는 이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진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는 그 장면에서 관객은 두 사람에게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을 본다.


  영화 '테이큰(Taken, 2008)'처럼 격렬하고 빠른 호흡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는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느리지만 치밀한 서사, 진중하고 묵직한 연출이 그려내는 어느 가족의 고통스러운, 그러나 절망으로 향하지 않는 초상화를 보는 일은 꽤 긴 여운이 남는다. 가족이란 어쩌면 '사랑'이란 이름의 태양빛으로 서로를 고통스럽게 태우기도 하고, 그 빛으로 온기를 얻어 살아가게도 만드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아호가 엄마를 자전거에 태우고 한적한 길을 지나가는 장면에서 나무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엄마의 얼굴에 닿는다. 이 가족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 빛으로 더이상 다치지 않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이제서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cinemaescap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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