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EBS 세계의 명화에서 방영해준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6)'을 보았다. 나오는 배우들이 하도 젊은 시절의 모습이라 제작년도를 헤아려 보니, 벌써 24년 전 영화다. 당시에 아카데미 상을 9개 부문이나 휩쓴 유명한 영화였는데도 나는 여적지 안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냥 뻔한 사랑 이야기, 정확히 표현하면 '불륜 치정극', 그것도 상영 시간이 2시간 42분이나 되는 영화를 구태여 보고 싶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포장을 해도 결국 이 영화는 분별력 잃은 남녀의 치정극일 뿐이다. 현실에서 이런 일은 지탄받아 마땅하고, 대부분 끝이 좋은 경우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사건을 사막이라는 물리적 공간, 그리고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으로 끌어와서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영화적 가공의 방식을 통해 불륜은 '불멸의 사랑'이 되고, 관객들은 두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극도로 몰입하게 된다. 마치 끊임없이 부는 사막의 모래 바람이 그 어떤 흔적과 자취도 지워버리는 것처럼, 이러한 류의 사랑이 가져오는 온갖 너절한 뒤끝은 보기가 어렵다.


  격동의 시대사가 들어간 이런 사랑 이야기의 대표작은 아마도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1965)'일 것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유리 지바고와 그의 연인 라라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냈다. 여기서도 유리 지바고는 유부남이지만, 라라와 딴살림을 차리고 딸까지 둔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사랑에는 진정성이랄지, 뭔가 가슴을 후벼파는 절절함이 있었다. 원작 소설이 가진 서사의 탄탄함 때문이기도 하고, 인물들이 가진 명징한 순수함이 설득력이 있기도 했다. 


  이에 반해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알마시(레이프 파인즈 분)란 인물은 지독히 이기적이다. 국제 사막 클럽의 일원인 그는 함께 지도 제작에 참여하게 된 영국인 동료 제프리의 아내 캐서린(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분)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캐서린은 남편을 생각해서 알마시에게 이별을 고하지만, 알마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그의 집착은 파국을 불러온다. 그는 비행기 사고로 화상을 입고, 기억을 잃은 '영국인 환자'가 되어서 캐나다인 간호사 한나(줄리엣 비노쉬)의 보살핌을 받는다. 영화는 알마시가 되찾게 되는 과거의 기억을 마치 퍼즐의 흐트러진 여러 조각들을 제대로 짜맞추는 과정처럼 구성해 나간다. 한나는 알마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청자(者)인 동시에 그 자신도 영화의 주요한 배역으로 기능한다. 한나와 인도인 킵의 사랑 이야기가 알마시의 사랑 이야기에 대비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밝고 건강한 삶의 기운을 보여주는 사람은 한나 뿐이다. 죽음을 앞둔 영국인 환자를 진심으로 보살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애인과 동료가 전쟁으로 죽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새롭게 찾아온 사랑을 기쁨으로 맞이했고, 상대가 떠날 때가 되자 담담하게 작별한다. 한나가 보여준 그 순수함과 희망의 모습은 줄리엣 비노쉬에게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여우 주연상을 안겨준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2016년에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제작 과정을 회고했다. 튀니지의 사막(스타워즈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에서의 작업이 추위와 바람 때문에 꽤나 힘들었고, 당시 밍겔라 감독과의 소통이나 상대 배우인 레이프 파인즈(Ralph Fiennes, 배우 본인이 그렇게 발음해 주길 원함)와의 러브신에 대한 불편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영화는 엄청난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국 여우 주연상은 받지 못했다는 것에 아쉬움이 남기는 했을 것이다. 


  그 기사에 달린 댓글 가운데 동굴 속에서 죽어간 캐서린에 대해 언급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죽은 캐서린의 모습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을 수 있느냐,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냐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아마 죽음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라는 의견, 사막이란 환경이 매우 건조하고 동굴의 서늘한 기운 때문에 그랬을 거라는 의견이 댓글로 달렸다. 어떤 이는 그러한 의견에 매우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는데, 영화를 미학적 관점에서 평가해야지 그런 실제적인 관점에서 보아야겠느냐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은 나도 뭔가 의구심을 갖게 되는 장면이었다. 아, 물론 이 영화에서 시신이 부패하는 장면을 보여줄 수는 없었겠지. 더군다나 이 비장미 넘치는 로맨스, 전쟁 서사극에서 어떻게든 여주인공의 죽음도 아름답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 장면이 보여주는 현실과 영화의 간극이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사랑 이야기가 가진 명백한 허구성을 입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동굴 속에서 알마시가 발견한 핏기 없는 창백한, 그렇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캐서린의 모습에서 관객은 '불륜 치정극'의 그 어떤 고약한 냄새도 맡을 수 없다. 아니, 맡아서도 안된다. 캐서린은 '불멸의 사랑'의 주인공으로 남아야만 하기에.


  결국 이 영화의 관객들은 그렇게 알마시가 사막에 묻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비탄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알마시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은 로맨티스트로 기억되는 것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사랑의 이상향, 결코 깨어져서는 안될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의 표상으로 24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관객들의 마음에 남아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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