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경험 있지 않아? 내러티브가 나를 밀어낸다는 느낌 받을 때 말야. 진짜 그런 때가 있다니까."


  언젠가 비평 수업 시작 전에 수강생 누군가 그렇게 하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러티브가 보는 사람을 밀어낸다는 거, 그게 가능해? 참 희한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말의 뜻을 새벽에 EBS 금요극장에서 방영해준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을 보고서 깨달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만든 이 SF 영화는 서기 2027년, 인류가 불임의 시대를 맞이하며 겪는 비극을 담아냈다. 영국을 배경으로 이민자와 타종교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압으로 대응하는 정부, 그에 반대하는 '피시당(Fish Party)'이라는 무장 정치 단체가 대립의 축을 이룬다. 기적적으로 아기를 가진 흑인 이민자 소녀 '키'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이다.


  영화는 정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데, 벡스힐 이민자 격리구역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면 마치 나치 수용소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민자들을 위한다는 피시당의 실체도 그리 정의로운 것이 아니다. 태어날 아기를 대중 봉기의 상징으로 내세우기 위해 빼돌리려는 피시당의 리더 루크는 폭력만이 유일한 항거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 분)는 그 와중에 어떻게든 키와 아기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애를 쓰느라 고군분투한다. 말하자면 인류의 희망인 '아기'와 아기 엄마를 무사히 구출해내는 임무를 맡은 셈인데, 중세시대 기사의 여정처럼 보인다. 테오와 기사가 다른 것이 있다면, 테오는 변변한 무기도 없고 오직 아기를 지켜내겠다는 신념과 진심만 있을 뿐이다.


  '칠드런 오브 맨'은 거창한 정치적 구호로 가득차 있으며, 음악은 종교 음악처럼 지나치게 장중해서 관객에게 그러한 미래 세계의 대서사에 감동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뭔가 대단한 메시지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허하고 진부하기까지 하다. 이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어쩌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마지못해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타자를 배척하고 차별하며 폭압적으로 대하는 정치 체제, 또는 그런 사람들의 신념 체계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는데 그렇게 명백하게 드러내는 영화의 방식 또한 투박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한마디로 정치적 프로파간다(propaganda)와 별다를 바 없다. 이 영화가 칭찬받을 수 있는 부분은 촬영과 미술에 한정될 뿐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썩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테오의 부인 역으로 나온 줄리앤 무어인데, 그렇게 괜찮은 배우를 데려가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극 초반에 아웃시켜 버리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2008년작 '이글 아이(Eagle Eye)'에서 거대 인공지능 컴퓨터 아리아 역을 맡은 줄리앤 무어는 얼굴 한 장면 나오지 않고, 오직 목소리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런 대단한 배우를 알폰소 쿠아론은 찬밥 취급해버린다. 내가 줄리앤 무어라면 이런 영화 안나온다. 클라이브 오웬은 열심히 뛰어다니기는 하지만 영 겉도는 느낌이다. 무성의한 것은 아니고, 배역에 몰입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나마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테오가 키의 통행증을 발급받기 위해 사촌 나이젤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나이젤은 정부의 막강한 관료로서 미술품 관리청장을 맡고 있는데, 전세계에서 소멸 위기에 처한 유명 예술품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들인다. 그의 집에 있는 한쪽 다리가 없어진 '다비드 상', 피카소의 '게르니카' 같은 것도 흥미롭지만, 나이젤의 저택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돼지 풍선 또한 놓쳐서는 안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1977년 앨범 'Animals'의 앨범 표지에 나온 돼지 풍선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탐욕스럽고 부패한 정치인과 지배 계급을 상징하는 은유로 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미술과 세트에 공을 들였다는 것은 알겠다 싶은 정도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내러티브가 나를 밀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해서 그 내러티브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클라이브 오웬의 겉도는 연기처럼, 나도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엄청난' 영화이기는 하다. 관객이 영화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영화라니...


  "난 그냥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


  테오가 나이젤에게 100년 후면 그렇게 모아놓은 예술품들을 볼 인류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뭐하러 그리 열심히 모으냐고 하자 나이젤은 그렇게 대답한다. 나도 이 영화는 그다지 더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생각할 건덕지가 그다지 많은 영화도 아니다. 쿠아론은 자신의 영화에 거창한 신념을 투사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그래비티(2013)'를 보고 싶은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음악이 좀 독특한 것 같아서 누가 맡았나 찾아보니, 영국 작곡가 존 태브너(John Tavener)이다. 그는 현대 종교 음악 작곡가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명성이 있는 사람이다. 역시, 이 영화의 음악은 '종교적'이었다.

**사진 출처: indiewi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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