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틀었는데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좀 있으니 화면 우측 상단에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란 설명과 함께 '퍼스널 쇼퍼'란 제목이 뜬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영화인가 궁금해서 보았다. 그래도 칸에서 상까지 주었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나에게 매우 낯선 감독이다. 어떤 영화들을 만들었나 살펴보니, 필모그래피에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가 뜬다. 아, 이 영화... 우연히 보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중간에 꺼버린 영화였다. 줄리엣 비노쉬의 나이든 모습도 내게는 정말로 충격이었더랬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블루(1993)'의 비노쉬는 얼마나 빛났던가. 아무리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늙어가는 여배우의 얼굴을 보는 것은 때론 가슴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그 영화에서 나이든 비노쉬와 대비되는 젊은 여배우가 나왔었는데, 바로 크리스틴 스튜어트였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내게 유부남 감독하고 바람난 철없는 여배우로 각인되던 참이었다. 결국 헤어지기는 했지만, 저 여배우가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영화 경력을 이어나갈 것인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다 어제 '퍼스널 쇼퍼(2016)'에서 스튜어트를 다시 만났다. 이 영화에서 스튜어트는 퍼스널 쇼퍼 모린 역을 맡아서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망해버린 영화를 심폐소생시켜서 다시 되살릴 정도로 좋은 연기다.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공허한 껍데기 같다.


  모린은 쌍둥이 오빠 루이스를 얼마 전 잃고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상태에 있다. 영매(媒)였던 루이스가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곁을 떠돈다고 생각하는 모린은 루이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루이스의 집에서 심령체(ectoplasm, 죽은 영혼에서 발산되는 유동성 물체)를 발견하고 공포에 질린다. 그것이 루이스인지 아니면 다른 제 3의 존재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어느날 모린의 휴대폰으로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문자가 온다.


  "난 널 알아, 너도 날 알고."


  그때부터 그 'Unknown'과 문자로 소통하기 시작한 모린. 그렇게 문자를 주고 받으며, 모린은 자신의 내면 안에 감춰진 욕망과 두려움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사실 주목할 부분은 모린과 Unknown이 주고 받는 문자 대화들이다. 모린에게 끊임없이 각성과 관심을 요구하는 Unknown의 문자들은 마치 글로 뭉쳐진 공포의 덩어리 같다. 안보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는 눈을 뜨고 보게 되는 공포 영화의 가장 무서운 장면처럼 모린도 그 문자들의 공격에 강박적으로 매여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관객들은 모린이 목격한 심령체나 또는 허공에 떠있다 저절로 떨어져 깨지는 컵이 나오는 반복된 장면들 보다 더 무섭다고 느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모린은 자신의 고객인 키라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면서 더 큰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다. 이렇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들은 전체적으로 매우 불균일하고, 툭툭 끊어지며, 여기저기 빈 구멍들이 나 있다. 이 영화가 칸에서 상영되었을 때, 다 보고 난 관객들이 야유를 보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도대체 칸에서 아사야스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이유가 뭘까 궁금해진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현대사회의 양면성과 고독하고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저 조잡하고 실없는 소리들의 나열(spooky hokum)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나는 후자의 편에 서겠다.


  물질과 영혼, 이승과 저승, 돈이 넘쳐나는 화려한 고용주와 그를 대신에 물건 사다 나르는 고용인 퍼스널 쇼퍼. 뭐 이렇게 이분법적인 세계 속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탐구하는 한 인간의 내적 여정이라고 해야할지, 겉포장지는 그럴듯하다. 막상 뜯어본 상자 속에는 '커다란 벽돌' 하나가 터억 하고 놓여있어서 그렇지. 중고 거래에서 사기꾼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다.


  이 영화에서 오직 볼 것이라고는 여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 밖에 없다. 지극히 예민하고 불안과 공포에 흔들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낸 이 여배우의 연기를 보았다는 것만이 이 영화에 대한 실망을 상쇄한다. 화려하고 매우 여성스러운 옷을 입었을 때에도 결코 관능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가죽 재킷에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스튜어트에게서는 중성적인 매력이 넘쳐난다. 어쩌면 영매로서의 재능을 루이스와 나누어 가진 모린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 중간의 영역에 서있는 모호한 존재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출연작들을 한번 살펴 보았다. 혹평을 받은 것도 있고 아주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도 있다. 적어도 스튜어트는 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이 배우로서 가진 역량과 가능성을 관객에게 충분히 입증해낸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자신이 칸에서 받은 감독상을 전기톱으로 잘라서 절반은 스튜어트에게 주어야할 것이다. 길 잃고 헤매는 이 영화의 분열된 이미지와 의미들을 힘겹게 이끌고는 결국에 종착지에 이르게 만드는 이 여배우의 저력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나오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조만간 볼 생각이다.



*사진 출처: filmcomm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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