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 오래전 읽은 시나리오 작법 책 첫부분에 나온 조언은 '20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지 못하는 영화는 망한 영화'라고 쓰여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영화를 보든 20분을 한계 시간으로 정해놓고, 그 영화를 볼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대개 괜찮은 영화들은 그 기준선 안으로 여유있게 들어온다. 다만, 가끔 그 20분을 넘겨서 인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대가()'라고 내가 생각한 영화 감독들이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이 그러했다. 그의 영화 '희생(1986)'은 나에게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영화였다. 세 번을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세 번 모두 보다가 졸았다. 나중에 눈을 떠보면 집이 불타고 있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세바스찬 융거와 팀 헤더링턴이 만든 다큐 'Restrepo(2010)'는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미군 장갑차 내부를 보여주는 화면은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관객을 놀라게 만든다. 2분 45초쯤이다. 내 머릿속의 20분 기준선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 탈레반이 설치한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터졌고, 다큐의 초반부는 폭발음에 놀란 미군 병사들이 전투에 돌입하는 그 짧은 순간을 긴박하게 담아낸다. 촬영을 맡은 팀 헤더링턴은 총 대신에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전투 현장을 찍는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촬영이다. 그는 무려 1년여의 시간을 장병들과 같이 지냈다.


  미국 잡지 'Vanity Fair'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다큐는 2007년 5월부터 15개월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격전지라고 알려진 코렌갈 계곡(Korangal Valley)을 사수하는 미 육군 부대 장병들의 모습을 담았다. 


  "거긴 죽음의 땅이지. 엿같은(holy shit) 곳이라구!"


  그곳에 배치되었다고 하자, 장병들에게 쏟아진 말들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험준한 협곡에 드문드문 자리한 부락들에 살고 있는 민간인들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도 없다.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을 정찰나갈 때에 오히려 군인들의 신경은 더 곤두선다.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르고, 탈레반과 내통하는 이들이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기 때문이다. 미군의 기습 작전으로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죽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여유조차 없다. 장병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전투에서 죽어나가는 것을 계속 목도하기 때문이다.


  다큐 초반에 일등병 Restrepo가 교전 중에 사망하는데, 부대에서는 협곡 맨 꼭대기에 짓는 초소 이름을 그를 기억하기 위해 'OP(outpost) Restrepo'라고 명명한다. 그는 무척 따뜻한 품성을 가진 이로 부대원들을 위해 식사 준비도 잘 해내고, 그가 연주하는 기타 연주는 팍팍한 막사 생활에 지친 다른 장병들에게 위로를 준다. 그런 그의 이름을 부대원들이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 초소에 붙인 것에 대해 어떤 장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곳의 일상은 아주 단순하다. 정찰과 휴식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데, 전투는 느닷없이 시작되므로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매일 하는 본부와의 교신 내용은 근처 부대에서 누가 죽고 다쳤다는 소식 뿐이다.


  다큐 후반부는 부대원들에게 하달된 'Rock Avalanche' 작전을 담아내는데,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작전에서 부대원들은 동료들를 잃는 비극을 겪는다. 카메라는 그들의 눈물, 두려움, 고통과 분노를 가감없이 그대로 담아낸다. 동료의 시신을 대충 덮고, 눈물을 흘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다음에는 누가 그렇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극도의 불안감을 견디면서 전투에 임한다. 그들은 오직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서 싸울 뿐이다. 거기에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의 국민들이나 그 어떤 대의명분 같은 것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것을 강조하며 일깨워주는 사람은 오직 부대장 뿐이다.


  "도대체 이 끔찍한, 말도 안되는 전쟁을 왜 그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서 하는 것인가?"


  이 다큐를 보는 동안 드는 의문은 그것이다. 그 전쟁과 파병을 결정하는 미국의 정치인들과 군 수뇌부들은 실제로 희생되는 군인들의 목숨에 얼마만큼의 무거움을 체감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미국 잡지 'The Atlantic'에서 언젠가 이에 대해 다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특집 기사는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수행하고 있는 전쟁의 규모가 갈수록 방대해지는 이유를 다뤘다. 거기에서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미국의 정치인들 대부분은 군대에 가본 적이 없는 이들이며, 실질적인 전투의 공포와 위협을 모르는 그들은 파병을 일종의 체스 게임의 말을 이동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 기사는 또한 이 시대의 미군들에게 더이상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의 대의명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진 시점에서 어떻게 군인들에게 목숨을 건 전투의 타당성을 설명할 것인지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옆의 동료가 전투에서 죽거나 다쳐도, 매일 경계 근무를 서는 것이 무섭고 힘들어도, 그들은 미국에 있는 자신들의 가족과 애인, 친구들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그런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다. 그런 어머니의 생일을 앞두고 그저 '생일 축하해요, 엄마'라고 했을 뿐이라고, 한 장병은 말한다. 그래서 이 다큐를 본 미군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했던 전투와 군인들의 실제적인 삶을 알게 되었다는 소감을 다큐를 만든 융거와 헤더링턴에게 무척 많이 알려왔다고 한다. 헤더링턴은 2011년 리비아 내전을 취재하는 도중에 폭발물 사고로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목숨을 걸고 했던 진정한 보도 사진 작가였고 다큐 제작자였다.


  다큐 마지막 부분에서 인터뷰를 하던 장병들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슬퍼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호소하고 있었다. 어떤 장병은 잠을 자면 악몽에 시달리기 때문에 차라리 깨어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어쩌면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할 무거운 상처들을 짊어진 그들에게 조국인 미국이 해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2010년 4월, 미군은 코렌갈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그곳에서 50명의 미군이 희생되었음을 알려주면서 다큐는 끝이 난다.


  다큐를 보고나서 우리 나라는 남북이 분단된, 휴전 상태의 나라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런저런 한반도의 위기 상황에서 '차라리 전쟁을 해서 쓸어버리자'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전투의 한복판에서 동료의 시신을 보고 울부짖는 'Restrepo'에 나오는 젊은이들의 얼굴을 한번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어떤 대의명분과 정치적 올바름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죽음의 전투는 그 군인들에게 '빌어먹을(f**king)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사진 출처: indiewire.com(사진 왼쪽이 팀 헤더링턴, 오른쪽은 세바스찬 융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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