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지나는 아파트 후문 담벼락 안쪽으로 쪼그만 초등생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서로 만지고 예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흔히 '턱시도'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는, 검정 바탕에 배 부분은 흰색을 띈 그 고양이는 짐짓 거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자애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낮에는 초등생 아이들이 와서 그러더니, 오후에는 중학생 여자애들이 그 난리였다. 담벼락 안쪽은 아파트 베란다가 접해있는 방향으로, 꽤나 넓은 풀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녀석은 그곳이 다 제 영역인 것처럼 해가 좋은 낮 동안 그곳을 차지하고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어느 날 오전에, 아이들이 오기 전에 녀석이 있는지 한번 그 담벼락 안쪽으로 가보았다. 나는 녀석이 그곳에 낮에만 오는 줄 알았더니, 아예 누군가 집을 지어주었고 집 옆에는 사료 포대와 물병까지 다 갖추어져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아파트 단지이기는 했어도, 고양이들 나름대로 영역 다툼이 있는 곳인데 이 녀석은 정말 '땡' 잡았군, 하고 생각했다. 내 기척을 느꼈는지, 두툼한 담요가 깔아진 집에서 천천히 나와서는 입을 쫘악 벌리고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그러고는 내 앞에 터억 자리를 잡고는 도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녀석은 여느 길고양이들과는 달리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는 녀석을 한번 쓰다듬어 주려다가 그만 두었다. 녀석은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구태여 내 예쁨까지 받을 필요는 없었다. 사랑을 넘치게 받는 존재들은 그 사랑의 귀함을 모른다.


  그런데 녀석의 몸은 생각보다 너무 뚱뚱했다. 하도 애들이 이것저것 간식을 사다 먹이는 모양인가 보네, 싶었다. 아무튼 네 팔자가 상팔자로구나, 하고 뒤돌아 나왔다. 그러다 어제 아파트 단지를 지나오는데 녀석을 보았다. 그곳은 녀석의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단지를 돌아다니는 녀석의 품새는 아주 여유가 넘쳤다. 나를 보아도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고 서있었다. 가만 보니 녀석의 몸이 비대한 것은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 것임을 알았다. 적어도 새끼가 세 마리 이상은 될 것 같았다. 새끼들 태어나면 그거 귀여워하느라 아이들이 더 난리를 치겠군, 하고 지나왔다.


  이 아파트 단지의 고양이들은 오랫동안 늘 적정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 가끔 1층 화단 밑에 누군가 사료와 물을 챙겨놓은 것을 보기는 했다. 그래도 고양이들끼리 영역을 두고 혈투를 벌이거나 떼지어 몰려다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이곳의 고양이들은 사람들에게 앵기는 법이 없었고, '거리두기'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대개는 사람을 보면 도망가기 바빴다. 고양이들의 생김새도 참 볼품없었다. '코숏(Korean Shorthair Cat, 토종 한국 고양이)'이라 부르는 길고양이들 가운데에 미묘들이 얼마나 될까마는 그래도 사람의 눈길을 끄는 녀석들은 드물었다. 대개는 말라 있었고, 털들은 윤기가 없었다. 옅은 노랑색 바탕의 '노랑이'들, 꺼먼색의 '턱시도' 녀석들, 세 가지 색이 뒤섞인 '삼색이'들이 전부였다. 더러 성질 나쁜 녀석은 사람을 보면 경계가 심해서 더 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아파트 단지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챙기는 캣맘들과 늘어나는 고양이들 때문에 불편을 겪는 입주민 사이의 갈등이 심각한 곳도 있다. 언젠가 기사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갈등이 있었던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캣맘들이 고양이 밥을 챙겨주기 시작하면서 불어난 고양이 개체수 때문에 입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구청에서는 중성화 비용이며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더이상의 개입을 꺼린 상태였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에서는 중재를 위해서 그런 일에 나름 일가견이 있는 이를 불렀다. 그는 오랫동안 길고양이 보호를 위해서 일해온 이였는데, 아파트 단지마다 불거지는 이런 갈등 속에서 오히려 고양이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중재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중재를 하게 된 그는 우선 캣맘들에게 더이상 먹이를 주는 일은 일체 하지 말고, 당분간 고양이들이 스스로 개체수를 조절할 수 있도록 놔두라고 부탁했다. 입주민들에게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 보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캣맘들은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사건'이 터졌다. 고양이들이 맹독성 먹이를 먹고 대량으로 죽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시 그곳을 찾은 그 중재자는 개탄했다. 자신들이 책임을 지지도 못할 고양이들에게 그저 밥을 주는 것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며, 입주민들의 마음을 얻지 않고는 고양이들도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일을 수두룩하게 보아왔던 것이다.


  최근에 인터넷 게시판에서 내가 본 글 가운데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자신의 동네에 갑자기 길고양이들이 엄청나게 늘어서 왜 그런가 했더니, 근처의 철거되는 재건축 단지에 서식하던 길고양이들을 모아서 캣맘들이 대거 이주시켰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그 동네 사람들에게도 불편을 끼치는 일이었지만, 그 동네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에게도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들의 세계에 갑자기 군대에 해당하는 고양이들이 들이닥쳤으니, 그건 그야말로 전쟁이나 다름없는 재앙이다. 한동안 고양이들의 피터지는 다툼이 이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고양이들은 귀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야생의 생태계에서는 의외로 흉포한 포식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읽은 과학 기사에는 어떤 동물학자가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정원에서 잡아온 조류들을 조사해서 발표한 내용이 있었다. 그 학자도 고양이가 그토록 다양한, 생각보다 많은 숫자의 새들을 사냥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고양이가 자연 생태계에서 의외로 조류의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이다. 고양이의 '은혜 갚기'라고 알려진 행동은 쥐나 뱀, 새와 같은 동물들을 잡아서 주인집 댓돌에 놓는 것을 말한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엊그제 본 사진에는 시골집 고양이가 잡아서 문 앞에 놓았다는 '꿩'이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믿지 않았을 텐데, 그 과학 기사를 읽고 나서 그건 진짜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고양이들의 삶이 고달픈 것이야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손에서 키워지는 고양이들의 수명이 일반적으로 10년 이상인데 반해, 거리의 삶을 사는 고양이들의 수명은 2년에서 3년 사이를 오간다고 들었다. 그런 고양이들에 대해 연민을 가진 어떤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도 나름대로 이해가 간다. 단순히 밥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포획해서 중성화 수술도 해주고, 그 고양이들이 살고 있는 곳의 주민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가며 고양이들이 보다 좋은 여건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애쓰는 이들도 있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도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고양이들을 향한 그런 따뜻한 배려가 남아있음을 본다.


  그러나 도시의 삶에서 길고양이들에게 인내심을 갖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밤에 울어대는 고양이 울음소리는 정말 견디기 힘들 때가 많다. 어느 해 겨울의 일이었다. 한밤중에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을 열어 보니, 아파트 출입구 근처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그 추운 겨울날에 짝을 찾는 애절함은 알겠는데, 소리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하고 끔찍했다. 마치 칠판을 쇳조각으로 쉴 새 없이 긁어대는 소리였다. 언제쯤 울음 소리가 그칠까, 하고 기다리는데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다시 창 밖을 내다보니, 러닝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젊은 남자가 보였다. 그도 자다가 깨서 나온 것 같았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맥주캔 같은 것을 고양이 쪽으로 내던졌다. 그제서야 고양이는 울음을 그쳤고, 놀라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비로소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재수 시절에 학원 친구 S와 길을 가다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뮤지컬 캣츠의 '메모리(Memory)'를 듣게 되었다. 내가 그 노래에 대해 주인공인 고양이가 과거를 추억하면서 부르는 노래라고 했더니, S는 이런 말을 했다.


  "아니, 어떻게 고양이가 과거를 추억할 수가 있어? 그런 게 가능해?"


  S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되물었다. 아마도 S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예전에 한창 주성치 영화를 열심히, 즐겁게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 주성치 영화팬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세상에는 주성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어쩌면 고양이에 대해서도 이 세상에는 고양이를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고양이를 그저 바라볼 뿐, 다가가지 않는다. 그 눈동자에 깃들인 세계는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오묘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길고양이들은 단 한번도 내가 불렀을 때 와본 적이 없으며, 나도 그 어떤 고양이에게 애착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래도 가끔 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것을 보면 무채색의 아파트 풍경에 다채로운 빛을 더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파트 담벼락의 그 고양이가 낳을 새끼들은 과연 누가 데려가서 키울 것인가, 요새 궁금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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