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츠이 야스타카의 소설집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꽤 오랫동안 책장에 처박혀 있었다. 2006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을 본 것도 있고, 그 원작자의 혐한 발언을 알게 된 뒤로는 더 보기가 싫어졌다. 그러다가 이제서야 읽어 보았다. 책에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외에 2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그 중 '악몽' 같은 경우는 작가가 대학 시절에 심리학에 심취했다더니, 거기서 영향받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정신분석 이론의 소설화 같은 것이랄까, 그런 것이 좀 독특하긴 했다.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그냥 좀 심심한 느낌이다. 아, 여기서 이런 설정을 따왔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 이 애니메이션에 대해 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죄다 스포일러가 된다. 이야기의 외피는 타임 리프(Time leap)라는 소재를 빌어온 SF(과학소설)을 취하고 있지만, 그 내부의 얼개는 로맨스, 성장 영화라는 틀을 갖추고 있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 그토록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The Girl Who Leapt Through Time)'라는 제목 때문인지, 시간을 거슬러 가는 것을 '타임 리프'라고 말하는데, 영어로는 '타임 슬립(Time slip)'이 더 보편적으로 많이 쓰인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의 여주인공 마코토가 몇 번이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의도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slip'이 가지고 있는 예기치 못한 '미끄러짐'의 의미 보다는 'leap'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것도 같다. 마코토는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 여행의 횟수만큼 과거로 '도약해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본 애니메이션 분석하는 것도 그렇고, 원작 소설도 읽어보니 별다른 내용이 없어서, 이걸 가지고 무슨 글을 쓰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에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하는... 요새 들어서 자꾸 떠오르는 일이 있기는 하다.


  J와는 1년 동안 같이 수업을 들었었다. 그 1년이란 시간 동안 J와는 말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다. 그랬는데도 나중에 J의 소식을 들었을 때, 한동안 충격을 받아서 마음이 꽤나 무거웠었다. 여러가지 불행이 겹쳤던 J는 아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같은 공간에서 1년이란 시간 동안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나는 별다른 친분도 없었으면서도 J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짠하다. 내가 본 J는 자신감이 넘쳤고, 솔직하며 직설적인 사람 같았다. 가끔 J를 떠올릴 때면, J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J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는 그렇게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그 수업 시간으로 돌아가서 J에게 한 번쯤은 물어 보고 싶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냐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친하지도 않은 내가 J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걸 듣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없다. J 보다 삶의 시간들이 더 많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만들고 싶은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J의 동기들 가운데에 누가 영화 감독이 되었다는 소식을 여태껏 들은 적이 없다.  


  요 며칠 동안 내내 마음이 무거웠었다. 건너 건너 아는 이의 죽음의 소식을 접했는데, 그는 내 또래였다. 5년 동안의 투병 기간은 생각보다 이르게 온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젊은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늙었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나이. 젊은 나이의 죽음은 '요절(夭折)'이란 단어를 쓰는데, '夭'란 글자 자체가 '젊어서 죽다'의 의미이다. 거기에 꺾일 '折'자를 더했으니, 젊은 나이의 죽음이 갖는 비통함이 배가되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노년의 나이가 되어서 죽음을 맞이하면 덤덤해질 수 있을까? 도대체 죽기에 적당한 나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지난 3월, 유럽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 전염병이 들불처럼 번졌고, 그 결과 사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 이들은 노인들이었다. 정부의 부실한 방역 대책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온 노인들의 피켓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죽어도 괜찮은 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나이에 찾아 오든지 죽음은 슬픈 일이다. 그런 죽음의 소식을 듣고 나니, 나에게 남은 날들은 얼마나 될까 헤아려 보게 된다.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것도 그런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언제든 죽음의 시간은 들이닥치기 마련이다.


  과거로 돌아가서 J의 대답을 듣는다고 해도, 나는 J가 세상을 향해 영화로 말하고 싶었던 그 이야기들을 대신 해줄 수가 없다. J의 못다한 이야기는 그렇게 남았고, 그것이 그와 가깝게 지냈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을 가슴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읽으면서 나는 그 오래전 수업 시간의 J를 떠올렸다.



*사진 출처: 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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