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빈민가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내가 가르쳤던 과목은 영어였다. 사실 무슨 대단한 뜻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고, 뭔가 좀 의미있는 일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나름의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시작했던 그 일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아이들은 수업 태도가 좋지 못했고, 기본적인 학습 능력도 상당히 많이 떨어져 있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6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알파벳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에 대해 이미 포기해버린 듯한 모습을 보인 점이었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도 없었으므로 수업 시간은 배우는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는 나에게도 고역이었다. 


  아이들의 가정환경은 매우 불우했다. 편부모 슬하, 또는 조부모가 양육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은 하층민에 해당하는 계층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계층의 아이들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아이들을 만나볼 기회도 없었다. 아이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무력감과 패배감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나는 헬렌 켈러를 가르친 설리번 선생도, '죽은 시인의 사회(1989)'의 키팅 선생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공부방을 위탁 운영하는 곳은 종교단체였는데, 그들의 태도도 문제가 있었다. 자원 봉사자 선생들을 고용인처럼 여긴달까, 그런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던 차에 가르치는 시간을 나중에 가외로 요구하길래 그만 두었다. 


  올해 EIDF 상영작인 크세니아 엘리안 감독의 '겨울 아이들의 땅(2018)'을 보다가, 문득 그 공부방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은 이제는 사회인이 되었을 텐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자신들이 처했던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잘 극복하고, 그래도 씩씩하게 잘 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전의 나는 그 아이들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희망의 기운이라도 불어넣어줄 수 있을 만큼의 인내심도, 이해심도 없었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겨울 아이들의 땅'에 나오는 7살 자카르는 형 프로코피, 부모와 함께 시베리아 최북단 지역의 돌간족(Dolgans)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유목 생활을 하는 소수 민족으로 2010년 인구조사에서 7800명 정도를 기록할 정도로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가도 가도 눈과 얼음 벌판인 이곳에서 사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러시아 정부는 가정 교사를 파견한다. 다큐는 가정 교사에게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그 두 아이들의 일상을 담았다. 70분 남짓한 이 다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자카르의 수업 시간의 모습, 부모와 함께 하는 일상, 형과 함께 눈밭에서 구르고 싸우는 모습, 이것이 전부이다. 그런데도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도시 생활에 찌든 이들에게 선사하는 힐링 다큐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첫 수업 시간에 젊은 여선생님 넬리가 자카르에게 묻는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음,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카르의 소망은 그러하지만, 소년이 선생님과 부모님, 형에게 하는 질문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형에게 우주가 얼마나 큰지 묻는가 하면, 순록 사냥을 따라가서는 죽은 순록의 근육이 왜 움직이는가를 아버지에게 묻기도 한다. 촬영 감독에게는 왜 일을 안하고 맨날 쓸데없는 사진만 찍고 있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하는데, 그 장면에서는 웃음이 나온다. 아이의 질문에 그 누구도 딱 맞는 답을 해주지 못한다. 그렇게 한없는 질문들을 던지면서, 아이의 꿈도, 희망도 커져간다. 


  키우는 개와 눈밭에서 구르고, 형과 눈싸움하다 얻어맞기도 하고, 아이가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가족과 광대한 자연 속에서 티없이 사는 모습은 결코 도시의 아이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기도 하다. 자카르와 형이 받는 문명의 혜택이라고 해봐야, 아버지의 작은 노트북으로 보는 괴수 영화 같은 것이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평온하고 행복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대 도시의 그 어떤 부모나 아이들도 자카르와 그 가족의 삶을 부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그러한 삶은 단절되고 낙후된, 발전의 가능성이 없는 원시적 삶일지도 모른다.


  끝이 없어 보이는 설원에 서 있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구김살이 없다. 그 누구도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하길 요구하거나 채근하는 법이 없다. 도시 아이들의 얼굴에 없는 생기와 순수함이 자카르에게는 가득하다. 그 얼굴을 보면서, 오래전 내가 가르쳤던 공부방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열패감과 깊은 좌절감을 읽어낼 수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도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제,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끝났다.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업과 직장, 더 좋은 집과 생활 환경... 그 기나긴 경쟁의 여정에서 고 3인 아이들은 겨우 한발을 떼었을 뿐이다.


  "우리 아들 시험 잘 봐서 꼭 의대 가자!"


  소원을 비는 쪽지에 어떤 학부모가 쓴 글귀 사진을 인터넷 뉴스에서 보았다. 이 시대 학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바라는 최고의 소망은 그런 것이었다.


  자카르가 사는 '겨울 아이들의 땅'에는 경쟁에서 뒤쳐졌다고 절망하거나 슬퍼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 광대한 설원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이 아이를 꿈꾸게 만든다. 그런 아이들이 존재하는 세상이야말로 희망이 있다고 할 것이다.



*사진 출처: marxfil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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