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V에서 재방해준 옛날 드라마 '바람은 불어도(1996)'가 끝난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엊그제 보니 그 드라마를 또 다시 틀어주고 있다. 이렇게 한 해에 같은 드라마를 두 번이나 방영해주는 경우는 드문데, 내가 편성 담당자가 아니니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편수가 적은 24부작 '청춘의 덫(1999)'이 끝난 후, 마땅한 대타 드라마를 찾지 못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옛날 드라마들을 도대체 왜 방영하느냐, 이걸 누가 보느냐, 그와 같은 의문을 가지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이러한 옛날 드라마들은 그 드라마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그 드라마에 나온 인물들의 이야기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중장년 세대들에게는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옛날 드라마들만 전문적으로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도 있는 것이다. KTV 같은 경우, '전원일기'를 계속 방영해주고 있는데, 이 또한 인기가 많다. KTV 시청자 게시판을 보면, 자신이 원하는 오래된 드라마 방영 요청에 대한 글, 추억의 드라마를 보게 되어 좋고 고맙다는 글, 왜 결방이 되었나 항의하는 글까지, 옛날 드라마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도 나름 대단함을 느낀다.


  '바람은 불어도'는 문영남 작가의 소설 '황가네 식구들'을 드라마로 각색한 것이다. 문영남 작가에게 큰 인기를 가져다준 실질적인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에 MBC에서 방영된 '분노의 왕국'도 꽤나 인상적이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배우 변영훈의 열연이 돋보이는 드라마였다. 아무튼 문영남은 '바람은 불어도'로 본격적으로 드라마 작가로 나설 수 있었고, 역시 이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배우 손현주는 문영남 작가가 평생의 은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일일 드라마로서는 무려 245부작, 거의 1년에 가깝게 '엿가락' 늘이듯 드라마가 방영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줄거리는 어떠한가? 인쇄소 공장장인 황정운(김무생 분)과 그의 철없는 동생 황정택(한진희 분), 그들의 어머니(나문희 역), 황정운의 세 아들과 그들의 가족을 둘러싼 바람 잘 날 없는 황씨 일가의 일상이 드라마의 주요 내용이다. 그야말로 3대가 모여 살면서 복작거리는, 전형적인 대가족 홈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도 이 드라마를 젊은 세대가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은 섣부른 추측이다. 요새 젊은 세대들이 TV 공중파와 케이블 채널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진부하다고 외면하는 것처럼, 당시의 젊은 세대에게도 당시 드라마들, 특히 일일 드라마에서 내세우는 가족, 가부장주의, 이런 것들의 가치관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리가 없다. 여전히 일일 드라마를 비롯해 주말 드라마를 보는 세대는 중장년층이었고, 파격적인 설정은 보기 어려웠다.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설정은 당시에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많았다. 동시대에 방영되었던 MBC의 '전원일기'도 시대적인 공감성을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었다. 가족의 모든 것을 묵묵히 자신의 짐으로 짊어진 가부장으로서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와는 다른 삶의 선택들을 하는 여러 자식들, 그들의 배우자들에게 부여된 며느리의 의무, 여전히 권위를 가진 조부모 세대, 이런 전형적인 틀에 박힌 일일 드라마의 공식을 '바람은 불어도'는 답습한다. 김무생의 부인 역으로 나오는 배우 김윤경은 성깔있는 시어머니 나문희를 아주 극진히 모시고 사는데, 그 자신도 큰 며느리(박성미 분)에게는 꽤나 고루하고 까탈스러운 시어머니 노릇을 한다. 박성미는 집안의 대소사를 잡음없이 해내는 큰 며느리이면서, 또 인자한 맏동서이기도 하다. 박성미야 말로 '낀 세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는 위치에 있다. 


  그에 비하면 윤유선이 맡은 둘째 며느리는 삶의 방식에 있어서 좀 더 자유롭다. 우선 분가를 해서 살고 있고, 자신의 어머니도 모시고 살고 있다. 다만 힘든 점이 있다면 남편(정성모 분)이 지나친 짠돌이인데다, 자신을 항상 어린애 대하듯 가르치려 하고 나무랄 때가 있어서 속이 터지곤 한다. 이 드라마에서 윤유선은 좀 철은 없지만, 따뜻하고 감정표현에는 솔직한 둘째 며느리의 모습인데, 뭔가 '전원일기'의 김회장 댁 둘째 며느리 수남 엄마(박순천 분)의 모습과 겹치는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이 드라마는 '전원일기'의 일일 드라마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시 KBS에서는 이 드라마를 홍보하면서 김무생의 셋째 아들 내외로 나온 배우 최수종과 유호정을 무척 강조했는데, 이것은 젊은 세대의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람은 불어도'에서 최수종이 보여주는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은 신세대와는 동떨어져 있다. 그도 여전히 가부장제의 수혜자로서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부인도 잘 따라주길 바란다. 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드물다. 오직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머니 나문희만이 그러할 뿐이다. 한진희의 부인 역으로 나오는 윤미라는 그런 면에서 좀 독특한 캐릭터이기는 하다. 늦은 나이에 한진희와 인연을 맺게 되는 윤미라가 보여주는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은 대가족과 가부장제에 맞지 않는다. 한마디로 철 없고, 경우가 없다. 그래서 큰 동서 김윤경이 보기에는 고쳐야할 '버르장머리'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3대가 바람 잘 날 없는 이 집안이 그래도 굴러가는 이유는 김무생 덕분이다. 그는 노모에는 다할 수 없이 효도하고, 가장으로서 충실하며, 아버지로서 자식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려고 최선을 다한다. 인쇄소 공장장으로서도 그가 직원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유능한 직장 상사 보다는 자애로운 '아버지'에 가깝다. 말하자면 '따뜻한 리더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그의 방식은 새로 부임한 사장이 보기에 구시대적인 비효율성과 비합리성의 총합일 뿐이다. 김무생이 오랫동안 일하면서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알아봐주던 전임 사장과는 달리 그 아들은 결국 해고 통보로 '구세대'인 김무생을 '퇴출'시킨다.

 

  내가 보기에 이 드라마에서 가장 현실성이 있었던 부분은 바로 그 대목이었다. '바람은 불어도'가 방영되던 그 시기는 인터넷 혁명으로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던 때였다. 기성 세대에게 그것은 새로운 변혁의 물결이었고, 거기에 적응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쇄소'라는 공간은 사회의 축소판이었고, 김무생은 그러한 기성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그가 겪은 일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닥친 현실이었다. 구세대의 지혜, 경험은 더이상 존중받지 못했고, 새로운 세대들이 배운 지식과 신문물이 커다란 파고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다.


  결국 김무생은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가출'을 감행한다. 재방된 이 드라마에서 내가 다시 눈여겨 본 회차도 이 부분이었다. 여관방에서 쓸쓸히 혼자 앉아있는 김무생의 모습은 그 시대 어떤 가장의 슬픈 모습이기도 했다. 드라마는 다시 김무생이 공장장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가장들은 그렇질 못했고, 이듬해인 1997년 말에 닥친 IMF 구제금융 사태는 더 많은 이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바람은 불어도'는 그해 한국방송대상 드라마 부문, 작가상(문영남), 여자 탤런트상(나문희)을 받으며, 명실공히 최고의 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은 시청률에서도 알 수 있는데, 역대 최고 시청률인 '보고 또 보고(1998)'에 이어 2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평균적으로 40~50%에 이르는 높은 시청률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무리한 연장 편성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지금의 시점에서 이 드라마를 보면, 마지막 대가족 동화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시대의 시청자들도 대가족을 그려낸 이 드라마의 비현실성을 모르지 않았다. 사라져가는 시대의 유물을 TV에서 바라보는 것과도 같았다. 가족은 점점 더 작은 단위로 해체되어 가고 있었고, 이듬해 겪게될 경제 위기를 통과하면서 드라마 속에서 이런 대가족을 보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물론 김수현은 꿋꿋하게 대가족 드라마를 써냈지만, 그 드라마들은 현실의 반영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설교를 이상화한 극본이었을 뿐이다. 김수현의 대가족 드라마들은 '부모 세대를 우습게 생각하지 말라'는 근엄한 훈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의 훈계를 사람들이 더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 시점에서 김수현은 새로운 드라마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언급하고 싶은 중요한 연기자로는 배우 김지영이 있다. 한국 드라마에서 따뜻한 할머니 역을 도맡아 했던 김지영은 중년의 나이부터 할머니 배역을 해냈다. '바람은 불어도'에서 둘째 며느리 윤유선의 친정 엄마로 나오는데, 사람 좋고 모진 구석 없이 따뜻한 품성을 잘 보여주는 연기를 한다. 이 드라마에서 허연 가발쓰고 연기한 나문희 보다 실제 나이는 좀 더 많았다. 나문희에게는 이 드라마 이후 보다 많은 할머니 역이 주어진다. 한진희는 다소 코믹한 인물 설정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다지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한진희도 영 이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다시는 그런 희극적인 배역은 하지 않겠다고 인터뷰 하기도 했다.

 

  지나간 드라마를 다시 보는 일은 때론 먼지 쌓인 책을 다시 들여다 보는 것과도 같다. 책장을 열어보면서 내가 그 당시에 느꼈던 느낌, 생각들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리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놓친 부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먼지를 털고 보면 그런 새로운 발견의 경험이 열린다. 오래되었다고, 오늘날에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쉽게 폄하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3대가 함께 정겹게 어울려 사는 대가족들이 있던 그 시대는 이제 멀리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그저 이렇게 드라마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이 마지막 대가족 동화는 KTV에서 평일 저녁 8시 30분부터 2회씩 방영되고 있다. 지나간 시대의 정서, 추억, 그리고 중견 연기자들의 그 시절 연기들을 다시 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기억해둘 만하다.

 

 

*사진 출처: 경향신문 자료 사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