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밖에 나갔다 오는 길에 보니,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들의 뒤편에 달력이 하나씩 묶어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노인들이었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는 반투명의 흰색 비닐 포장이 된 새해 달력을 얻는 것이 오늘의 주요한 일과였음을 짐작케 한다.
대체적으로 많은 곳에서 12월 1일에 달력을 나누어 준다.
최근 몇 년 동안 달력 얻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실감했다. 주거래 은행의 벽걸이 달력은 3개월이 한 장에 인쇄된, 아주 실용적인 달력이어서 오랫동안 써왔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더이상 벽걸이 달력은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난감했었다. 다른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벽걸이 달력은 비용 때문인지 만드는 곳이 점점 줄어들었고, 탁상 달력들로 대체되고 있었다. 작년에는 그나마 우체국에서 얻은 벽걸이 달력이 참 좋았었다. 지역 우체국 직원들이 찍은 아름다운 풍경 사진들이 달마다 인쇄된 달력이었다. 한 달이 지날 때마다 달라지는 계절의 풍광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내년도 우체국 벽걸이 달력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내년 달력은 탁상용으로만 배부되고 있었다. 벽걸이 달력은 이제 구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다. 얼마나 경기가 좋지 않으면 이럴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그걸 느끼게 된 것은 몇 년 전부터 변하기 시작한 달력의 재질 때문이었다. 부들부들하고 약간의 두께감이 느껴지던 재질이 얇아지고, 다소 거친 질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달력의 단가를 높이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나 사진 작품 대신에 그저 그런 그래픽 디자인, 일반인 대상의 공모전에서 뽑은 그림 같은 것들이 실렸다. 예전의 화려하고 멋진 그림과 사진이 있었던 달력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뭐랄까, 달력의 몰락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는 달력은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라 구매하는 것으로 바뀌는 추세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각양각색의 독특한 디자인의 달력들이 연말이면 시장에 나오고 있다. 작년에 내가 받은 달력 가운데에는 달력에 자신이 원하는 필체로 직접 날짜를 기입할 수 있는 '창작' 달력도 있었다. 그걸 일일이 써넣는 것이 귀찮아서 누군가에게 주고 말았다. 나에게는 정말 별로인 달력이었다.
예전에는 달력 얻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달력 인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말이면 사람들은 이리저리해서 달력을 네다섯개 얻는 일이 보통이었다. 경기가 호황이었던 시절에는 은행들도 실적이 좋았을 터이니 달력 인심도 아주 넉넉했다. 그러나 이제 걸어두면 돈이 들어온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은행 달력 얻는 것은 VIP 고객에게나 쉬운 일이다. 보통의 예금 잔고를 가진 이에게 은행이 배부할 달력은 없다. 없다면서 나에게는 주지 않는 달력을 바로 옆 고객에게 건네는 것을 겪어 보면, 자본주의의 그 쓰디쓴 뒷맛이 어떤가를 잘 알게 된다.
달력이 흔하던 시절에는 명절 때 전을 부치는 채반에 흰색의 달력 종이들을 쫘악 펼쳐놓고, 그 위에 각양각색의 전들을 놓았다. 달력 종이들은 기름을 잘 먹었으므로 어머니들의 명절 필수용품이었다. 나중에는 그 종이들에 형광물질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외면당했지만, 그런 시절도 있었다. 요새처럼 요리에 쓰는 기름종이들이 잘 나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일력(日曆)'을 보는 것도 흔했다. 매일 한 장씩 뜯게 되어있는 그 달력을 걸어놓은 집과 상점들도 많았다. 일력에는 열두 간지(干支)에 따른 동물들이 손톱만큼 작게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말(午, 십이지의 일곱째)의 날에 태어났으므로, '말'자를 넣어 이름을 지으려 했다고 가끔 지나가는 말로 웃곤 하셨다. 물론 말자, 말순이란 이름의 '말'은 '끝(末)'이라는 뜻이다. 아들을 낳길 간절히 바라던 시대에 원하던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나면 그런 이름을 짓던 시대도 있었다. 드라마 '아들과 딸(1992)'에 나오는 등장 인물인 막내딸 '종말이'의 이름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일력은 최근에 다시 유행을 타면서 새로운 세대에게도 익숙한 물건으로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낼 때, 그 일력들이 주르륵 뜯겨나가는 클리셰가 많이 쓰였었다. 만약에 요새 그런 걸 쓰는 감독이 있다면, 관객들은 감독의 역량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시대를 거쳐온 이들에게는 그런 클리셰를 보는 것이 정겹고 반가울지도 모른다.
지금의 사람들에게 벽걸이 달력 보다는 책상 달력이 더 유용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책상 달력을 얻는 것이 더 수월해진 것이 꽤 되었다. 그런데 책상 달력도 받아보면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가 참 어렵다. 날짜의 크기가 너무 작으면 보기가 불편하고, 또 나에게는 필요한 음력(陰曆)이 없는 것들도 많다. 어떤 달력에는 '손 없는 날(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이 땅에 없는 날, 이사나 중요한 일을 할 때 이 날을 선택한다)'이 적혀 있어서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달력을 참 좋아했었다. 또한 메모할 공간이 너무 작아서도 안되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조건들에 부합한 책상 달력을 2년 전에 썼었다. 어느 출판사에서 만든 달력이었다.
작년에 그 책상 달력을 구하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걸 건네준 이에게 물어 보니, 출판사의 사장이 바뀌면서 달력을 없애버렸다고 했다. 새로운 사장은 출판사 창업주의 아들로 유학을 다녀온 이였는데, 자신의 아버지가 공들여서 내놓았던 달력을 쓸모없는 낭비로 여긴 모양이었다. 그가 해외에서 배운 학문이 마케팅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적어도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만드는 책과 함께 달력의 의미도 아들인 그 보다는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아직 내년도 벽걸이 달력을 구하지 못했다. 그걸 구할 다른 곳을 알아 보는 대신에, 그냥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에 맞추어 사는 수 밖에 없지 하면서도, 오래전 연말이면 서로 달력을 넉넉히 나누어 주고 받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