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영화 보기에 대한 '기벽()'이 하나 있다. 남들 다 보는 영화는 그냥 안 보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오래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보았던 영화들을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본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천장지구(1990)' 같은 영화들. 어제 EBS 세계의 명화에서 보여준 '가을의 전설(1994)'도 그랬다. 이 영화의 음악은 라디오에서 그렇게나 많이 들었어도,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제 TV 틀다가 나오길래 보았다.


  진짜 음악이 정말 대단했다. 제임스 호너가 맡은 이 영화의 음악은 그냥 영화를 압도해 버린다. 그것이 영화에 꼭 좋기만 한 것인지 모르겠다. 영화 자체는 그저 그랬다.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도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다. 다만, 브래드 피트와 줄리아 오몬드의 젊은 시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브래드 피트를 처음 영화에서 본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1992)'에서 였는데, 로버트 레드포드의 젊은 시절을 빼다박은 모습이어서 놀랐다. '가을의 전설'에서의 브래드 피트의 얼굴은 그로부터 겨우 2년 지났을 뿐인데도, 뭔가 '거칠고 삭은' 느낌이 났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에서 그의 얼굴과 함께 연기에서 느껴지는 '폭력성' 때문에 좀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성 관객들이 그렇게 잊지 못하는 이 영화의 트리스탄 역에 대한 느낌과는 좀 달랐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와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안젤리나 졸리는 최대한 언론에 언급을 자제했지만, 브래드 피트가 이혼의 책임을 졸리에게 돌리는 발언을 연이어 하자 반격에 나섰다. 피트가 양아들 매덕스에게 폭력을 휘두른 일이며, 양육비를 제대로 주지 않은 문제도 제기했다. 피트는 알콜 중독의 문제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을의 전설'의 트리스탄에게서 받았던 느낌은 그런 실제적 사실과 어느 정도 중첩되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배우의 얼굴, 그리고 그 연기는 언제나 현실과 전혀 다르게 가공된 것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역시 최근에 본 '유주얼 서스펙트(1995)'의 캐빈 스페이시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스릴러 영화는 캐빈 스페이시를 일약 유명 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가브리엘 번을 비롯해 베니시오 델 토로의 젊은 날의 얼굴도 볼 수 있다. 나는 특히 캐빈 스페이시의 연기를 아주 주의깊게 보았는데, 이 영화에서 그는 매우 교활하고 사악한 인물을 연기한다. 2017년, 배우 앤서니 랩이 자신이 미성년자일 때 스페이시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스페이시의 배우 경력은 마감되었다. 그 외에도 다른 여러 건의 폭로가 이어졌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이런 일을 볼 수 있다. 미투 운동으로 여성 성악가들에게 저지른 성추행이 드러난 플라시도 도밍고도 평생의 빛나는 경력을 뒤로 하고 혹독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오페라 팬들에게는 늘 최고의 선택으로 여겨지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제임스 레바인은 미성년자 성범죄가 드러나면서 그야말로 그의 전생애에 걸친 음악 경력 자체가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레바인의 경우는 그가 지휘한 오페라들이 당대 최고의 성악가들과 했던 작업이라는 점이 오페라 애호가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가 지휘했던 오페라가 음반이나 DVD로 더이상 나오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유주얼 서스펙트'로 돌아간다. 이 영화에서 버벌 킨트가 감춘 악인의 얼굴은 실제로 스페이시가 현실에서 저지른 추악한 범죄들(그는 놀랍게도 모든 처벌에서 벗어났다)을 떠올리며 보면 더 소름이 끼친다. 심지어 캐빈 스페이시는 이 영화 촬영 당시에도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같이 출연한 가브리엘 번이 증언했다(2017년 선데이 타임즈 인터뷰 참조). 당시에 영화 촬영이 이틀 동안 중단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스페이시가 어린 배우들을 상대로 부적절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몇 년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아직 안본 '아메리칸 뷰티(1999)'를 언제쯤 보게 되기는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영화의 주연인 스페이시의 면상을 보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괴로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어떤 배우들은 그 젊은 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행복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해리슨 포드가 그렇다. 다음주 EBS 세계의 명화는 '위트니스(Witness, 1985)'를 방영한다. 혹시 이 영화를 안본 이들이라면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피터 위어 감독에 주연 배우로는 해리슨 포드, 켈리 맥길리스가 나온다. 사실 대단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영화 속 해리슨 포드의 젊은 날 얼굴이 참 아름답다. 포드는 액션을 주로 한 영화들이 유명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감정 연기도 섬세하게 잘 해내는 배우라는 것을 입증한다. 상대 여배우인 켈리 맥길리스도 빛나는 미모가 돋보인다. 누군가 쓴 이 영화의 리뷰 댓글을 읽다가 웃은 적이 있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아미시(Amish) 공동체의 경건한 삶을 살던 엄마는 이듬해 아들을 버리고 톰 크루즈에게 가버리는데...' 


  1986년에 개봉한 영화 '탑건'에서 켈리 맥길리스는 미모의 비행 교관을 맡았다. 댓글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제 밤늦게 '가을의 전설'을 보고 나서 KTV를 돌려 보니, 오래된 한국 영화를 하고 있다. 대갓집 담벼락이 나오는 장면을 보고, '맹진사댁 경사'인가 보네 했다. 그러자 화면 속에서는 배우 구봉서가 나오고, 왼쪽 상단에 '맹진사댁 경사' 타이틀이 떴다. 나는 EBS의 '한국 영화 걸작선'에 나왔던 오래전 흑백, 컬러 영화들은 거의 다 봤다. 간혹 못본 영화들을 KTV에서 볼 때가 있는데, 그건 그동안 영상자료원에서 새롭게 발굴한 영화나 저작권 문제가 해결된 영화들이다. 그렇게 만나는 영화들은 반갑다. 누군가는 그 구닥다리 영화가 무슨 재미가 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단지 영화 공부 때문에 그 영화들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 영화들은 정말로 재미있다. 그 지직대는 오래된 화면 속의 영화들에는 그 시대의 사람들, 그들의 생각이 들어 있고, 그것을 살펴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돌아본다.


  내 영화 공부의 8할은 EBS 영화들에 빚진 것이다. 초창기 EBS에서 보여준 '세계의 명화'들은 정말로 대단했다. 당시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좋은 영화들을 방영해 주었다. 주로 영화 교과서에나 볼 수 있는 흑백 영화들이 많았다. 내 생각에 오래전 그 영화들을 직접 선정한 담당자는 진정한 '영화광'이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 담당자에게 깊은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 영화들 때문에 나는 영화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EBS에서 보여주는 영화들은 무척 평범하다. 마치 별 특색없는 옛날 비디오 가게 같다. 그 점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제는 그 오래된 비디오 가게 같은 EBS 세계의 명화에서 '천장지구'도 보고 '가을의 전설'도 본다. 남들 다 본 영화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보는 것도 생각보다 꽤 괜찮다. 어쩌면 그 배우의 연기와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 속에서 변해가는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살아온 시간들도 돌아본다. 영화는 그렇게 그것을 보는 이의 삶과 함께 흐르고 있다.



*사진 출처: commonsensemedia.org (영화 'Witness'의 해리슨 포드와 켈리 맥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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