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매일의 일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갑옷(armor)같은 거죠.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건 문명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의 갑옷은 푸른색 프렌치 워크 자켓(French work jacket)과 투박한 면바지, 어깨에 둘러맨 작은 카메라 가방, 편한 스니커즈였다. 그는 뉴욕 패션 사진계의 거장 빌 커닝햄이었다. 늘 자전거를 타고 뉴욕 시내를 누비면서, 그가 좋아하는 의상을 입은 사람은 누구든 찍었다.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여러 파티와 행사장을 누볐다. 그렇게 그가 찍은 사진들은 뉴욕 타임즈에 'On the Street'과 'Evening Hours'라는 이름의 포토 에세이로 실렸다.
리처드 프레스(Richard Press)가 2010년에 만든 다큐 'Bill Cunningham New York'은 빌 커닝햄의 사적인 모습을 담았다. 그는 뉴욕 패션계의 유명인사들을 담는 사진 작가였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커닝햄을 감독 리처드 프레스는 8년 동안 설득했고, 마침내 다큐를 찍을 수 있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에게 감독이 다큐가 끝나갈 무렵에 묻는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은 있냐고.
"그러니까, 내가 '게이(gay)'냐고 지금 묻는 거 맞아요?"
리처드 프레스가 'Yes'라고 외친다. 커닝햄의 대답은 이러했다.
"난 항상 일하느라 바빴어요. 밤낮없이 일했죠."
그랬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옷'만이 가득했다. 그는 많은 셀럽(celebrity)들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지만, 그들이 그의 마음에 드는 멋진 옷을 입었을 때만 찍었다. 카트린 드뇌브를 거리에서 보았지만 그는 찍지 않는다. 별로 흥미있는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자신은 파파라치(paparazzi)가 아니며, 시대의 패션을 기록하는 사진 작가라고 말하는 빌 커닝햄의 표정에는 대단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가 자신의 직업에 임하는 자세는 '수도승'같다. 그는 자신이 초대되는 연회나 행사장에서 술과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다. 그곳에 가기 전에 미리 3달러 안팎의 식사로 끼니를 때운다. 오직 그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입은 '패션'이다.
그가 평생 동안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유명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뉴욕 타임즈에 오랫동안 기고한 'On the Street' 칼럼에는 온전히 거리에서 만난 각양각색의 의상 사진으로 채워졌다. 그 기록은 일종의 패션 사회사이기도 했다. 일반인들의 패션에서 다가올 유행의 흐름을 읽어내고, 자신만의 안목으로 시대를 기록했다. 뉴욕 역사 협회에서 빌 커닝햄의 사진 작업들을 소장하고 기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평생을 옷에 미쳐서 산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찍는 화려하고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카네기홀에 딸린 그의 작은 스튜디오는 소박한 침대 하나와 네거티브 필름이 가득한 여러 개의 캐비닛, 패션 관련 서적들이 전부였다. 화장실은 복도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썼다. 그러다 카네기홀 재단에서 리모델링을 진행하면서 입주한 예술가들을 퇴거시키게 되는데, 커닝햄도 어쩔 수 없이 재단에서 마련한 아파트로 옮기게 된다. 그는 새로 입주한 아파트 집주인에게의 주방 시설을 제거해달라고 요청한다. 그에게는 사진을 보관할 장소가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돈이란 건 가장 값싼 거에요. 자유가 세상에서 제일 값진 거죠(Money is the cheapest thing. Liberty is the most expensive)."
빌 커닝햄은 자신의 사진 작업에 돈이 물드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그가 입은 푸른색 프렌치 워크 자켓은 프랑스 지하 상가에서 파는 작업복이었다. 파리 청소부들이 입는 것과 같은 옷이었다. 그 옷은 그가 타고 다니는 슈윈(Schwinn) 자전거와 함께 그만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다큐에서 그는 자신의 29번째 자전거를 소개한다. 28번째 자전거는 도난당했다. 자전거를 타고 뉴욕을 누비는 패션 수도승, 빌 커닝햄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이 다큐를 보는 이들은 빌 커닝햄의 눈이 가장 빛나고 반짝거리는 순간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때, 그의 얼굴은 설레임과 즐거움이 가득하다. 20대 때 징집되었던 그는 1950년대 프랑스에서 군복무하면서 패션에 눈을 뜬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자신만의 모자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가 파는 모자는 마릴린 먼로와 진저 로저스 같은 유명 여배우들이 쓸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다 우연히 패션 사진 작업을 하게 되면서 그의 일생은 옷에 바쳐졌다.
오직 '옷' 사진으로만 꽉 채워진 삶.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화려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 옷이나 찍어서 내다파는 인생 아니었냐고. 냉소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존재한다. 특히 예술 분야는 실제적인 유용성과는 대부분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를 한번 생각해 보자. 영화가 세상에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영화 감독과 비평가들이 하는 일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을까? 지나간 청춘의 날들에, 나는 영화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 진심으로 믿었었다.
빌 커닝햄은 2016년, 87세로 세상을 떴다. 죽기 전까지 그의 사진 작업은 계속 이어졌었다. 다큐에 나왔을 때는 80에 가까운 나이였는데도 변함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일 같은 옷차림에 자전거를 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나이까지 이런 열정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이 다큐의 마지막 장면에서 커닝햄은 이렇게 외친다.
"아이구, 이젠 그만 찍읍시다. 나 일해야 한다구요."
영화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만약에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오직 영화에 대한 열정만으로 평생의 삶을 지탱해나가는 누군가가 만드는 영화 속에 있을 것이다. 그 영화에 들어있는 그 무언가가, 그것이 꿈이든 매혹이든 어떤 이의 삶을 흔들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의 삶이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 영화는 구원의 영화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그런 영화를,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열정이 필요하다. 빌 커닝햄의 삶을 담아낸 이 다큐는 그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다큐는 archive.org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은 제공되지 않는다.
**사진 출처: gettyimag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