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2016년까지 합정역 근처에 있었다던 '축지법과 비행술'학원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그 학원의 존재 자체가 다른 예술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다는 이야기부터 학원을 운영하던 이는 지금은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는 후기까지 흥미있게 읽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에 '대박 창작'의 비밀을 알려준다는 학원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무언가를 창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대박 아이템 발굴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다. 창작의 세계에서 평범한 것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 무언가 특이한 것, 눈길을 끌 만한 것, 반전이 있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찾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쓴다. 그러나 그런 소재를 찾는 일은 바닷가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세상 속으로 나가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풀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니 생각해 본다. 내 이야기, 내 가족의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그것이 바로 문학과 예술에서 자전적 이야기가 그토록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다큐에서도 사적 다큐(Personal Documentary)가 어느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 우리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에서 뽑아낼만한 뭔가가 그다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과 얽힌 비밀이라던가, 특별한 사건 사고와 관련된 이들을 가족으로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어떤 이는 그런 이야깃거리를 가진 창작자를 부러워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너는 그런 가족을 두어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행운이나 있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머리 터지게 소재 찾느라 애써야 한다구!"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Stories We Tell, 2012)의 감독 사라 폴리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엄청난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11살 때, 갑작스러운 암 발병으로 세상을 뜬 어머니의 삶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감독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아마도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겠지만,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대박 아이템'이 된다. 물론 사라 폴리도 처음에는 무척 놀라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본다. '이거 가지고 뭔가 만들어 봤으면 좋겠는데...'


  감독의 생부로 판명된 이도 역시 창작자로서 같은 생각을 한다. 그래서 책을 펴내려고 하는데, 폴리는 반대한다. 자신과 형제 자매, 양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생부는 아쉬움을 꾹꾹 눌러가며 포기했는데, 정작 딸인 사라 폴리는 나중에 욕심이 생긴 모양이다. 그리고 이 다큐를 만들었다. 인터뷰를 해주던 생부가 묻는다.


  "도대체 이 다큐를 만들어서 네가 얻고자 하는 게 뭐니? 이걸 보는 사람들에게 뭘 보여주고자 하는 거야?"


  감독을 이제까지 친딸로 알고서 키우고 살아온 양부도 같은 질문을 한다. 이 다큐 작업을 통해서 원하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겠느냐고,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 말하는 이야기들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있겠느냐고. 딸에게 유일하게 진실을 말해줄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사라 폴리는 어머니와 연관된 사람들을 죄다 찾아서 불러놓고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고 진지하게 대답하던 사람들은 다큐 마지막에 가서는 한결같이 지치고, 괴롭고,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떤 이는 울 것 같은 표정이다. 감독의 양부 마이클은 이렇게 말한다.


  "감독으로서 넌 정말 잔인(brutal)하구나. 나에게 내레이션을 하라고 하는 것부터 해서 너무 가학적(sadistic)이지 않니?"


  진짜 사라 폴리는 감독으로서 자신의 다큐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그 어떤 양보도 없다. 양부의 내레이션을 녹음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칼같이 잡아내어 다시 하게 한다. 자료 화면으로 쓰겠다면서 양복을 입고 야외 수영장에 들어가라고 요구하는데, 머리가 잠길 정도로 그 찬물에 더 깊이 들어가라고 말한다. 나중에 촬영이 끝나고 몸을 덜덜 떠는 장면까지 찍으니 양부는 손사래를 친다. 양아버지 마이클은 정말 보살 같다. 연극배우였던 그가 들려주는 발음 좋은 내레이션은 정말로 훌륭하기까지 한데, 그 모든 것을 다큐 작업 내내 함께 해야했던 그의 심적 고통은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진실을 알기 위한 여정. 1시간 40분에 가까운 이 다큐는 양부가 찍어놓은 감독의 어머니 다이앤의 젊은 시절의 화면들, 재연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화면들이 마치 한편의 드라마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거기에 어머니와 알고 지냈던 이들이 제각각 들려주는 사실의 편린들이 진실이라는 하나의 그림에 색을 입혀간다. 조각보를 만들어 내듯, 관객들은 그 모든 자료를 가지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 가족의 진실에 접근한다.


  그러나 그렇게 파악되는 진실은 감독 사라 폴리 본인에게도, 인터뷰에 응한 모든 이들에게도, 관객에게도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어쩌면 그 과정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실체가 그렇게 어렵고 알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과연 어머니 다이앤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다이앤은 혼외 자식인 사라를 낳아서 키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부 형제 자매들은 그 과정에서 어떤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일까?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는다.


  어쨌든 이 놀라운 사적 다큐는 감독에게 여러 명예와 찬사를 안겨주었다. 남들에게 드러내기 어려운 출생의 비밀조차 창작의 소재로 써먹는 예술 세계의 '냉혹함'을 이 다큐에서 본다. 비난이 아니라 칭찬의 의미에서의 '냉혹함'이다. 객관적인 엄정함. 그것이야말로 창작자에게 가장 필요한 요건이다. 이 사적 다큐는 어쩌면 충격적이고 선정적일 수도 있는 가족의 비밀을 통해 관객에게 '진실'의 의미에 대해 묻고, 뜻밖의 진실에 접하게 되면서 겪는 혼란과 고통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일임을 상기시킨다. '나'의 이야기가 '너'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야말로 사적 다큐가 지향해야할 지점이다. 단순히 내가 겪은 특별한 이야기, 소재를 구술하는 것에서 그치는 일은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소재 기근에 근심하는 창작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사라 폴리처럼 출생의 비밀 같은 대박 아이템도 없고, 놀랄만한 가족사도 없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정말이지 때론 '대박 맛집'의 비결이라든지, '대박 주식'을 짚어내는 귀신같은 안목처럼 '대박 창작'의 비법이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재능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믿으며 매일매일을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 마치 매일 그물을 엮고 손질해서 바다에 나가는 어부처럼 그렇게 살 뿐이다. 어느 날은 허탕을 치겠지만, 그 언젠가는 배가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물고기가 걸리게 될 날도 있을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평소 하던대로 했을 뿐입니다."


  영화 '기생충'이 그토록 엄청난 성공을 거둘 줄 알았느냐는 질문에 감독 봉준호는 그렇게 대답했다.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쌓인 시간들 위에 비로소 '운'도 더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어쩌면 '대박 창작'의 비밀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storieswetellmovie.com(사진 속의 인물이 감독 사라 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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