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tific American'이라는 미국 과학 잡지가 있다. 과학 뉴스들에 관심이 있어서 오랫동안 뉴스레터를 받아서 보았었다. 언젠가 기사 읽는데 하단에 크루즈 선전이 뜨길래 뭔가 했더니, 과학자들이 연구 목적으로 항해하는 크루즈 여행에 참가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소개글을 보니까, 무슨 남극 펭귄도 구경하고 뭐 여러가지 자연 탐사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 저런 여행이라면 가고 싶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전염병 시대를 맞이하고 보니, 그 꿈은 어쩌면 영영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크루즈 여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대한 바이러스 배양선을 떠올린다.


  크루즈선 뿐만 아니라 지금의 이 시절에는 모든 여행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EBS '세계 테마 기행'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는 이 프로그램 보면서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좋고 고맙다는 글들이 가득하다. 아마도 새로 제작이 어려우니, 올해 방영분들은 예전 것들 재방송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도 어디냐 싶다. 유명 관광지들은 물론, 세계 각지의 소수민족들을 비롯해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을 볼 수 있어서 오래전부터 참 좋아했던 방송이었다.


  사실 새로운 곳의 비경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그 여행을 이끌어가는 출연자가 누구냐도 참 중요했다. 아무리 멋진 풍경도 밋밋한 설명과 별다른 특색이 없는 출연자가 나오면 더이상 눈길이 가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은 가끔 일반인 시청자들에게도 출연 기회를 주는데, 그런 경우에는 더 안보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여행에서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했다. 기억에 남는 출연자들과 함께 했던 TV여행은 무척 즐거웠었다. 방통대 김성곤 교수는 중국의 여러 명소에서 아주 우렁찬 목소리로 한시를 읊었는데, 마치 음유시인 같았다. 영화 감독 양익준의 캄보디아 여행도 의외로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관광객이 아니라, 그냥 현지인처럼 보일 정도로 친화력이 돋보였다.


  유별남 사진작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현지 사람들과 조화롭게 잘 섞이는 모습이 좋았다. 특히 아직도 기억이 나는 일이 있는데, 아마도 남미 안데스 여행에서였을 것이다. 정확히 어느 나라였는지는 모르겠다. 산악 원주민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되었는데, 열 두서너살 쯤 되는 아들과 홀어머니가 사는 집이었다. 어렵게 집안 살림을 꾸려가던 원주민 어머니는 아들 걱정으로 가득했다. 아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던가, 아무튼 적응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지내던 차였다. 아이가 눈망울이 맑고 착해서 더 안타깝고 그랬던 것 같다. 유별남 작가는 그 아이에게 힘이 되길 바라면서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고 액자에 잘 넣어서 선물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마음에 걸렸던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방송이 나가고 나서 그걸 본 여러 사람들이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문의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아이를 도와주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하자, PD가 놀랄 정도였다. 어떻게 현지 코디와 연결이 되어서 사람들이 보낸 성금들이 잘 전달되었다는 후기도 읽었었다. 그 소년은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꽤 컸을 것 같다. 사람들이 보여준 관심만큼 어려움을 이기고 잘 살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세계 테마 기행'은 수려하고 멋진 풍경만을 담아내지는 않는다. 때로는 고된 노동의 일상을 사는 현지인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 유황 광산의 노동자들, 네팔의 동충하초 채취꾼들의 삶 속으로도 들어간다. 험한 오지에서도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사는 소수민족들의 모습도 다채롭게 보여준다. 이 세상에는 그토록 다양한 이들이 각자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도 한번씩 돌아보게 만든다.


  가끔씩은 보다 보면, 뭔가 다 섭외(?)되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마을에 들어갔는데 원주민들이 전통의상 입고 공연을 하고 있다던지, 특별한 관광지로 안내해줄 현지인이 갑자기 나타난다던지, 아무튼 그런 장면들은 뭔가 좀 낯설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도 기획과 설정에 지쳐있어서 그런가, 여행 프로그램에서도 전적인 행운의 만남과 우연성만을 믿을 수가 없게 된 면도 있다. 하긴 그렇다. 우리가 그런 프로그램에서 보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경치와 기분 좋은 경험, 착하고 소박한 현지인들이다. 바가지를 씌우는 현지의 악덕 상인이나 소매치기와 사기꾼은 화면에서 절대로 배제되어야할 인물들일 것이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여행지에서 만날 확률이 꽤나 높은 이들임에도 그러하다.


  언제부터인가 '세계 테마 기행'을 보면서 그냥 보는 것만으로 여행지에 다녀왔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렇게 세계 각지를 '눈'으로만 보는 TV 앞의 소파가 편하게 느껴졌다. 이 프로그램이 처음으로 방영된 것이 2008년 2월이었다. 그러다보니 여러번 방영된 관광지도 많다. 이제는 그런 곳이 나오면 맛집이며 꼭 봐야할 곳들을 줄줄 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출연자의 동선에서 어디 한군데가 빠지면, '아니 그곳은 안가나?' 하기도 한다. 오랜 TV 관광여행의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의 이 전염병 시대가 끝나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페트라, 요르단에 있는 고대 도시의 유적지. TV 화면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이다. 물론 가서 보는 것이 화면 속의 그 풍경 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기대는 하지 않는다. 관광을 간다는 것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재미난 영화도 있고, 의외로 별로인 영화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마주하게 되는 평범하고, 때론 지루한 일상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점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말야, 좀 우습지 않아? 우린 새로운 곳에 왔는데, 모든 게 별다를 게 없다는 거(You know, it's funny... you come to someplace new, an'... everything looks just the same)."


  아주 오래전에 본 '천국보다 낯선(1984)'의 에디의 대사를 나는 실망했던 관광지들에서 떠올리곤 했다. 정말로 잊을 수 없는 명대사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언젠가 이 모든 어려운 시기가 끝나고 페트라에 가보고 싶다.



*사진 출처: ebs.co.kr (동충하초 채취를 하는 네팔 산악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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