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맷 슈레이더 감독의 다큐 'Score: A Flim Music Documentary(2016)'을 보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 요새 보는 영화들이 다큐에 치우쳐져 있다. 어, 그런데 잠깐만, 예전부터 나는 극영화 보다는 다큐를 무척 좋아했던 사람이잖아,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다큐 'Score'는 말 그대로 영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무성 영화 시절에도 주로 오르간 연주로 대표되는 음악들이 영화에 들어가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영화의 역사에서 어떻게 영화 음악이 변천해왔는가를 들여다 본다. 뭐 나름대로 분석한다고 신경심리학자 불러다 놓고 음악이 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인터뷰도 한다(솔직히 그 부분은 쓸데없는 사족같다). 현재 잘 나가는 영화 음악 작곡가들이 서로 주고 받는 이런저런 자화자찬(?)들도 재미있다. 한스 짐머, 토마스 뉴먼, 트렌트 레즈너 같은 유명 영화 음악 작곡가들의 면면을 보는 재미,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다큐에서 가장 빛나는 영화 음악들 덕분에 귀가 호강하는 다큐가 되겠다. 요약하면, 생각보다 극한 직업인 '영화 음악가'들의 세계 탐구에 더해 가슴 뛰게 만드는 좋은 영화 음악이 주인공인 다큐인 셈이다.


  기존의 영화 음악가들은 골방에서 영감을 받아 모조리 혼자 다 작업하는 것 같았던 인식이었는데, 이제는 영화가 거대 산업이 되다 보니 영화 음악도 여러 사람이 팀을 만들어서 하는 하나의 공장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영화에 음악이라는 혼을 입히기 위해 음악가들이 쏟는 열정도 참 대단했다. 오만가지 악기들로 가득찬 작업실이 5개나 되는 이도 있었고, 다양한 소리를 내기 위해 아프리카 토속 악기까지 수집해서 작업에 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다큐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무성 영화 시절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왔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 화면이었다. 영화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그 50초 가량의, 사람들이 기차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담았을 뿐인 그 작품. 왜 그 짧은 화면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것일까...


  그 장면을 처음 본 것은 영화 공부를 시작한 첫해에 들었던 과목 '영화의 이해'에서 였다. 영화의 기본이 되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배웠던 그 시간. 주로 명작 영화들의 장면장면들이 수업 교재로 쓰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와일드 번치(1969)', 그리고 한국 영화 '만다라(1981)'도 있었다. '만다라'는 도입부 롱 쇼트가 몇 분으로 느껴지는지를 적어야 했는데, 수강생들 모두 다 틀렸던 기억이 난다. 


  아, 그랬었지. 나는 'Score' 다큐를 보는 도중에 그 시절이 생각났다. 첫해에 들었던 과목 가운데에는 '다큐멘터리 영화사'도 있었다. 그 과목도 내가 참 좋아했던 수업이었다. 그때 첫시간에 보았던 다큐가 '북극의 나누크(1922)'였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기념비적인 작품. 감독 로버트 플래허티는 다큐의 시조처럼 여겨졌지만, 그 작품이 온전한 다큐 정신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몇몇 장면들은 재연된 것이며, 사실성에 문제가 있는 부분도 있었다. 나누크의 부인으로 나온 여성이 실제로는 플래허티의 이누이트 동거녀였고, 당시의 이누이트 인들이 작살이 아닌 총으로도 사냥했음에도 그런 장면은 배제했다는 점은 철저하게 플래허티가 계획한 화면들로만 구성된 기획 다큐의 측면이 강하다. 로버트 플래허티는 아주 노련하고 영민한 영화 제작자였다.


  그럼에도 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이 무성영화 다큐는 관객들이 주인공 나누크와 그 가족의 일상으로 마법처럼 빠져들게 만든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도 지금 내가 다시 본다면, 그냥 시큰둥하게 보고 말았을 작품.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영화에 넋이 나간 상태였으므로, 영화에 대해 배우는 모든 것이 놀랍고 기쁘고 그랬었다. 오로지 열정만으로 지겹고 참기 힘든 영화도 보았다. 인종차별을 당연시하는 온갖 수사로 가득한 3시간 짜리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에서 KKK단원들이 구국의 열사처럼 등장하는 것도 그래서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그토록 영화를 좋아했을까? 특히 다큐를 더 좋아했던 이유는 뭘까? 영화를 보면서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보여주는 매혹적인 세계들 때문에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모두는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시 맞닥뜨리는 우리 자신의 일상이 얼마나 평범하고, 때론 지루하고 보잘 것 없게 느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글쎄, 사람마다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이유들이 다 다르겠지. 내게는 영화가 나와는 다른 사람들, 세계들을 보여주는 창이었고, 그러한 응시를 통해 내가 조금씩 성장한다고 느꼈었다.


  대학 시절에 전공 수업을 열심히 듣기는 했어도, 나중에는 철학과 문학, 종교 관련 수업으로 학문적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녔었다. 철학과 애들은 내가 부전공하는 줄 알 정도였다. 그때 들은 서양 근현대 철학 수업은 진짜 어려웠다. 중세 철학사에 비하면 덜하기는 했지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아직도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 가다머의 해석학을 설명해주던 강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지평과 너의 지평이 만나는 것. 그래서 그렇게 만난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것. 그것이 그의 철학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창고에 있는 박스 어딘가에 그때 수업시간에 받은 프린트 자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보관했다. 어쩌면 영화는 내가 가진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소중한 친구로 여겨졌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특히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실제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 사건들을 보면서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그것을 처음으로 보던 시절, 영화에 대한 내 첫마음을 일깨워주는 다큐인지도 모른다. 볼만한 다큐를 찾으려고 재생 목록을 뒤적거리다가, 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그 다큐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서 이렇게 적어본다.



*사진 출처: filmmonth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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