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납은 카테라를 '언니'라고 부른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엄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테라는 그렇게 부르면 헷갈리니까 하나로 정하라고 한다. 그러자 자이납은 '진짜 엄마 아냐'하면서, 카테라의 늙은 어머니에게 '엄마'하고 안긴다.


  "어젯밤에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 폭탄이 우리집에 떨어져서 우리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랬어요."


  도대체 23살의 카테라와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사흐라 마니 감독의 '침묵하는 여성들을 위하여(A Thousand Girls Like Me, 2018)'는 EIDF 2019 개막작으로 상영된 작품이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이 여성 감독은 카테라에게 일어난 참혹한 비극에 대해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울림은 너무나도 크고 깊다.


  카테라는 자신을 강간한 아버지를 고발한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Sexual Abuse)를 당한 카테라는 3번 임신했고, 아버지는 아기들을 사막에 버렸다. 4번째 출산한 아이가 자이납이다. 카테라는 다시 임신하게 되자, 아버지를 고발했다. 율법학자들을 찾아가 물었지만, 그들은 참고 살라거나 기도하라는 말만을 했다. 15번째 찾아간 율법학자가 카테라에게 해답을 주었다. 


  "미디어 앞에 나가서 말하시오."


  카테라는 부르카(burqa)를 입고 TV에 나가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증언한다. 아버지는 기소되었지만, 정식 재판은 1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 아버지 친가 사람들의 위협과 협박이 이어지고, 카테라는 경찰과 변호사들을 만나느라 돈을 다 써버린다. 뱃속의 아기는 법적 증거이기 때문에 낙태를 할 수 없다는 판사의 명령에 따라 카테라는 아기를 출산한다. 태어난 아기의 DNA를 검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카테라의 아버지라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강제로 그랬다는 것을 우리가 입증해야 합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왜 저항하지 않았냐, 왜 신고하지 않았냐, 왜 주변에 알리지 않았냐를 문제삼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입증하지 않는다면, 유전자 검사는 별 소용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변호사의 판단은 냉정하다. 카테라의 아버지는 매번 폭력을 일삼았고, 남동생들이 막으려고 하자 남동생들도 때려서 내쫓았다. 그 집에서 일어난 그 엄청난 일들을 증언하는 이웃들의 증언과 그들의 지장이 빼곡히 찍힌 고소장도 소용이 없다. 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느냐고? 밤낮으로 폭언과 폭력이 행해지는 그 집에서 어렸을 적부터 살아본 카테라가 아니라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카테라는 자신에게 일어난 그 끔찍한 비극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이 입증해낸 그 유명한 실험. 반복된 전기 충격을 제어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개들은 나중에 전기 충격을 제어하는 버튼이 제대로 작동이 되어도 그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그냥 자신에게 오는 전기 충격을 다 받아낼 뿐이다. 왜 가정폭력의 희생자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 환경에서 벗어날 그 어떤 시도나 행동도 하지 않을까? 무기력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카테라는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친가쪽 사람들은 카테라가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죽음의 위협을 일삼는다. 이른바 명예 살인(Honor Killing). 드디어 이루어진 재판에서 카테라 아버지의 유죄가 인정되지만, 형량은 선고되지 않고 계속 미뤄진다. 2015년에 있었던 재판의 형량 선고는 다큐가 완성된 2018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판 후 카테라는 친가의 위협과 주변 사람들의 소문과 시선을 피해 하루살이처럼 이사를 다니며 떠도는 삶을 이어간다.


  "너와 나는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정해진 운명인가 보다."


  카테라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카테라는 자신에게 지워진 그 운명에 맞선다. '운명'에 해당하는 라틴어 'fatum'은 입으로 말해진 것(utterance), 선언된 것(declaration)의 의미가 있다. 이미 공표된 것이므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죽음(death)의 뜻도 있다. '치명적인'이란 뜻의 영어 'fatal'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미 정해진 것에 대해 카테라는 거부의 뜻을 표명한다. '말'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카테라의 그 결심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카테라의 그 목숨을 건 '발화(發話)'는 자신과 두 아이들의 인생을 구한다. 여성 인권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카테라는 자이납과 모하메드를 데리고 프랑스로 떠난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에는 행복한 카테라와 아이들의 사진이 올라간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카테라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무수한 여성들이 얼마나 더 침묵의 시간들을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 다큐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보는 내내 가위눌리는 느낌'이라고 썼다. 그렇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욕지기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카테라와 그 두 아이들의 시간은 계속 이어진다. 그들이 짊어진 운명의 짐은 겨우 조금 덜어졌을 뿐이다.


  용기. 1955년 12월 1일, 한 흑인 여성이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 때문에 체포된 여성의 이름은 로자 파크스(Rosa Parks). 결코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그 작은 행동이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용기를 가지고 한 작은 행동, 목숨을 걸고 하는 말 한마디, 그것이 새롭게 쓰여지는 역사의 시작이다. 카테라의 용기 있는 '말'이 부당한 운명에 침묵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을 언젠가 우리가 직접 보게 되길 소망한다.



*사진 출처: EIDF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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