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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ㅣ 라틴어 수업 1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EBS 클래스 e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좋은 강의들이 참 많다. 최근에 들은 최장순의 '기획의 세계'도 좋았고, 또 이전에 들은 작가 장강명의 글쓰기 강의도 기억에 남는다. 특히 글쓰기 강의는 다시 블로그에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인상적인, 마음을 울렸던 강의가 또 있다.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수업'과 '공부법 수업'이 그것이다. 이 분은 직함도 여럿이다.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 교수, 사제 등등. 스스로를 '공부하는 노동자'로 칭하는 그는 공부 경력만 30년이다. 그런 그가 아마도 가장 좋아할 것 같은 호칭은 '선생'이지 싶다.
이 책은 그가 대학에서 강의한 라틴어 수업을 정리한 책으로, EBS의 클래스 e는 이 책의 TV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에는 TV에서 다 다루지 못한 여러 주제들, 이야기들이 실려있어서 흥미롭다. 방영된 '라틴어 인생수업'이 인기가 좋았는지, 얼마 안있어 '공부법 수업'이 4부작으로 편성되었다(이 강의는 공부 잘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가 아니다). 두 강의들 모두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동일 선생이 들려주는 인생의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공부법 수업'에서는 선생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감동적인 부분들이 많았다. 사적인 자리도 아닌, 그런 대중적인 강의를 위한 방송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들려주는 모습이 남달랐다. 아마도 그러한 인생 이야기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청춘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처음 방송에서 선생의 강의를 듣게 되었을 때, 좋은 환경에서 나고 자란 학자 신부인가 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사제들의 교육은 교구의 장학금으로, 수도회에 소속된 신부들은 수도회에서 책임을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세계에도 사람마다 가진 이런저런 배경의 차이가 존재하고, 그것에 따라 진로가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한 선생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소위 시쳇말로 흙수저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선생이 강의에서 들려준 자신의 십 대 시절은 단칸방에, 매일 술을 마시는 아버지와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어머니,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 그런 가운데 마음을 둘 데 없었던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친했던 친구의 집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친구 형의 서재에서 선생은 인생의 빛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책이었다. 온갖 고전 문학과 철학 책이 그에게 숨을 쉴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주었다.
선생은 자신이 결코 머리가 좋거나,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덕성이 있었다. 열정과 성실성이었다. 그것이 그의 공부 인생 30년을 지탱한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책을 통해 만나는 지식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꾸준히 쌓아가게 만들었던 성실성으로 인해 그에게는 이런저런 명예로운 호칭들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내세우기 보다는, 지식을 탐구하는 '공부 노동자'로 자처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그의 책 '라틴어 수업'에는 그의 그런 소망, 특히 청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보석같은 조언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이 책에는 각 장마다 붙은 라틴어 경구에 대한 강의로 이루어져 있다. 나에게 좋았던 부분은 5장 '단점과 장점(Defectus et Meritum)'이다. Defectus와 Meritum. 그 장은 우리 각자가 가진 자신의 단점과 장점을 생각해 보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과연 내가 단점이라고 생각한 것은 단점이기만 한 것일까? 그것은 나에게 전적으로 불리하기만 한, 괴로움의 단초만 제공해주는 것일까? 최근에 본 다큐 'First Position(2011)'은 발레 영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거기에는 시에라리온 출신으로 내전에 부모를 잃고 미국 유대인 가정에 입양된 미카엘라가 나온다. 미카엘라는 발레의 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흑인인 데다가 백반증이라는 피부병까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카엘라의 목과 어깨부분의 피부는 얼룩덜룩해 보인다. 그런 피부를 가진 것을 단점으로 여기는 미카엘라에게 양어머니는 이런 말을 해준다.
"네 피부가 그래서 눈에 띈다면 너에게는 좋은 일이야. 수많은 발레리나들 가운데, 관객들은 너를 더 잘 기억하게 될 테니까."
미카엘라의 Defectus는 그렇게 Meritum이 된다. 놀랍지 않은가? 미카엘라의 얼룩덜룩한 피부는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보는 관점을 바꾸니 남들에게는 없는 장점이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우리 자신의 단점과 열등감들은 새롭게 봐주어야할 장점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활용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28장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Dum vita est, spes est)'도 좋았다. 살아있기 때문에 실패와 고통도 감내할 수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희망이란 좋은 거에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렇게 좋은 건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요."
영화 '쇼생크 탈출(1994)'에서 주인공 앤디는 그렇게 말한다. '희망'은 그렇게 살아있는 모든 이들의 특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대사이다.
이 책의 라틴어 경구들은 방황하고 고민하는 청춘들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조언이기도 하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가을 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마음이 서늘한 이들에게 든든한 마음의 외투가 되어줄 것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