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동생이 집에 잠깐 들렀다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나에게 물었다.
"같이 영화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 그 쪽에서 잘된 사람 있어?"
나는 잠깐 생각해 보고는 대답했다.
"없어."
영화 감독 되기 어려운 거야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때 같이 공부했고 알고 지냈던 이들 가운데 입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화 관련 책을 쓴 사람도 없는 듯하다. 내가 관심있어서 들었던 글쓰기 수업에서는 두 명이 등단했다. 한 명은 지금 아주 잘 나가는 중이고, 한 명은 책 좀 쓰다가 지금은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써놓고 보니, 참으로 예술의 세계란 얼마나 무지막지한 곳인가 싶다. 순전한 재능의 세계, 그것이 기본이다. 거기에 더해 미친 듯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베스 카그먼 감독의 다큐 영화 'First Position(2011)'은 매년 뉴욕에서 열리는 'Youth America Grand Prix'에 참가하는 6명의 발레 유망주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대회에서 입상하면 유명 발레 아카데미 장학금, 여러 발레단에서의 취업을 보장받는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예선이 열리고, 그 가운데 선발된 경연자들이 뉴욕에 모여서 최종 경연을 치룬다. 한마디로 난다 긴다 하는 발레 영재들의 피터지는 각축장이다.
6명의 출연자가 들려주는 각각의 사연, 그리고 마지막 경연 장면까지 러닝 타임 1시간 3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다. 아무리 9년 전 다큐 영화라 해도, 그 경연 결과를 말하는 건 스포일러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보일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 한번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대 뒤에서는 눈물과 한탄, 자책이 가득하다. 그곳에 오기까지 그들 모두가 겪은 시간들은 마치 전쟁같다. 그리고 승자와 패자가 결정된다.
출연자들 가운데 눈부신 재능으로 상을 거머쥔 입상자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2011년에 찍은 다큐에서 그렇게 반짝거렸던 발레 영재들은 어찌 되었을까? 대부분 발레 무용수로서 경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발레를 그만 둔 경우도 있었다. 당시 12살의 미코는 대단한 유망주로 주목받았고, 다큐 이후로도 세계 유명 경연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런데 미코는 발레를 그만 두고 대학에 진학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시에라리온 출신으로 내전에 부모를 잃고, 미국 유대인 가정에 입양된 미카엘라의 이야기가 참 극적이다. 발레의 세계에서는 드문 흑인인데다가, 미카엘라는 백반증까지 가지고 있다. 최종 경연을 앞두고는 발목 부상으로 내내 고생한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이겨가며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미카엘라는 마치 부상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 사람처럼 무대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다큐를 보는 내내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분야는 다르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부딪혔던 재능의 한계에 대해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피아노를 5년, 중학생 때는 바이올린을 3년 동안 배웠다. 둘 다 정말 좋아서 배웠지만, 나는 내가 연주자로서의 재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끗하게 포기했다. 그렇게 배운 것을 실황연주 들을 때 써먹는다. 어디에서 연주자들이 실수했는지, 어느 부분에서 손이 삐끗해서 음정이 나갔는지, 어느 정도 연습을 했는지 대강 알아차릴 정도는 된다.
그리고 영화. 나는 이 '영화'라는 괴물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청춘을 삼켜버렸는가를 생각해 본다. 그건 아니지,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대상에게 '괴물'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미안해진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떠오른 '영화'의 이미지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많은 이들이 영화에 미쳐서 자신의 젊은 날들을 그 속에 내던져 버렸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은 입구를 탐색하다가 진작에 가버렸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그 여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 안전하게 탐험할 수 있는 지도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영화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 결과, 인생의 시간들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비극이 따로 없다.
"무서운 이야기네."
동생은 내 말을 듣더니 그렇게 말했다. 아마 다들 뭔가를 하면서 먹고는 살겠지. 누구는 유학까지 다녀와서 먹고 살 방도를 찾으려 무슨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그게 벌써 10년 전이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 세계는 재능과 노력, 운의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이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한 세계야. 살아남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거든.
다시, 'First Position'. 미카엘라에게 발레를 가르친 스승은 '부상을 입을 수도, 실수할 수도 있지만,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조언한다.
"Keep dancing!"
미카엘라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어코 얻어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사진 출처: theupcoming.co.u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