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산책 나가는 길에 이른바 '효도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오는 아줌마를 보았다. 무슨 노래인가 했더니, 요새 유행하는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이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려는데, 마침내 나와 거리가 좀 가까워졌을 때 그 아줌마가 라디오를 내 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나는 우아하고, 잽싸게 그걸 피해서 옆으로 비켜섰다. 아마도 그 아줌마는 자신이 듣는 노래를 나한테도 한번 들어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은 해본다. 물론 내 마음 속 대답은 'No, thank you'였지만.


  요새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계속 나오는 이야기가 그 미스터 트롯 가수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음악 취향은 가요를 좀 듣기는 하셨어도, 트롯은 아주 질색을 하셨다. 그런데 우연히 그 트롯 프로그램에서 젊은 가수들이 노래하는 걸 보고 트롯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시게 된 듯하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젊고 세련된' 트롯이었다. 게다가 그 7명의 트롯 가수들(그들은 항상 팀으로 예능에도 출연한다)의 인생사는 어찌나 다들 기구한지, 특히 어머니는 그 가운데 당신이 좋아하는 가수 K의 불운한 성장기를 자주 언급하셨다. 가수 K의 노래가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도 소개되어서 한번 듣기는 했는데, 확실히 음색이나 창법이 남다르게 느껴지기는 했다. K는 높은 인기만큼이나 이런저런 구설수도 많아서 연예 뉴스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건 걔가 철 없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야. 난 K가 잘 되었으면 한다. 노래를 너무 잘해."


  어머니는 K를 둘러싼 이런저런 구설에 대해 그리 말씀하셨다. '팬심'이란 게 있다면 저런 건가 보다, 하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에 새삼 놀랐다.


  내 음악 취향은 그쪽은 전혀 아니었으므로, 모 방송국의 '미스 트롯'으로 작년부터 일기 시작한 트롯 열풍이 광풍이 되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다만, '미스터 트롯'이 올해 방영된 이후, 공중파는 물론이고 케이블 채널을 점령하다시피한 트롯 관련 방송들에 피로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이 현상의 근원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한 마음도 들었다.


  이것과 관련해서 자료들을 찾다가 방송국 관계자들의 익명의 인터뷰들을 보니, 시청률 문제가 가장 커보였다. 인기가 바닥이었던 예능 프로그램도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특별 출연하고 나면 저조했던 시청률이 급등했다고 한다. '시청률 깡패'인 트롯 프로그램 앞에서는 답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좋은, 참신한 예능 프로그램 기획안을 내놓아도 윗선에서는 트롯 관련 프로그램을 언급한다고 했다.


  젊은 연령대의 시청자들이 공중파와 케이블에서 이탈해서 OTT(Over The Top Service: 인터넷 기반 미디어 콘텐츠 제공 서비스)로 가는 동안, 기존의 시청방식에 익숙한 중장년층들이 케이블 채널의 주요 시청자층을 차지한 것을 트롯 열풍의 한 요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보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만든다'라는 것이다. '미스터 트롯' 경연 대회는 진작에 끝났지만, 그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특히 '사랑의 콜센터'라는 예능 프로는 이 글을 쓰는 현재, 30주 연속 목요일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 


  며칠 전 그 프로그램을 한번 보니,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신청곡들을 미스터 트롯 7인방 가수들이 불러주는 형식의 이 프로그램은 전화 연결에서부터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전화 연결이 된 시청자는 300번 넘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신청자 가운데에는 네팔 이주민 여성도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전화기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걸까 싶은 궁금증이 밀려왔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가수 K는 구창모의 '희나리'를 불렀는데, 뭔가 확실히 내가 전에 알던 그 노래와는 달랐다. 진중했고, 울림이 있었으며, 잘 다듬어진 창법으로 부른 그 노래는 비록 노래방 기기 점수 판정으로 낮은 점수를 받기는 했으나, 내게는 나름 새로운 충격이었다.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인기있는 대표적 '먹방'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열렬한 팬들은 요새 불만이 많은데, 트롯 예능 프로그램의 폭발적 인기로 이전에는 재방 삼방까지 되었던 '맛있는 녀석들'이 밀려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케이블 채널의 인기있는 재방 목록을 트롯 예능이 차지하고 있다. 그야말로 '트롯 전성시대'인 셈이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내가 읽은 자료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빈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 언급되었던 리뷰였다. 성장한 자녀들이 집을 떠난 후, 중년 여성이 겪는 고독과 슬픔의 감정을 의미하는 이 말을 트롯 열풍의 원인에 대입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트롯을 즐겨 듣고 좋아하는 주 연령층이 중장년층 여성이라 하더라도 '빈둥지 증후군'은 좀 과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기는 해도 한편으로 수긍이 안가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읽은 인터넷 게시판의 글이 그러했다. 트롯 열기에 극도의 짜증과 피로감을 느낀다는 게시글에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제가 하지 못한 효도를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해주고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줄 모릅니다. 저희 어머님은 그 친구들의 노래를 들으며 삶의 의미를 다시 찾고, 매일매일을 활기차게 지내십니다." 


  그러자 거기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효도는 님이 해야 하는 것이지,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대신 해주는 거 아닙니다."


  아니 뭘 저렇게 '뼈 때리는' 글을 쓰나 싶었다. 그 말을 들으니 과연 '효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어쩌면 트롯 가수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며 어떤 누군가의 어머님이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효도의 '아웃소싱(outsourcing)'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다음엔 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잘 들어드리기 위해서, 결코 내 취향이 아닌 미스터 트롯 가수들의 노래를 찾아 들어 보았다. 어머니가 칭찬해 마지않는 임영웅이 부르는 '고맙소', 그리고 신나는 이찬원의 '진또배기'도 들었다. 나는 효도의 길이 쉽지 않음을 새삼 느끼며 유튜브 창을 조용히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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