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클린 뒤 프레, 라는 여성 첼리스트가 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이 놀라운 첼리스트는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다. 열일곱 살 때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적어도 이 협주곡 만큼은 자클린의 연주를 뛰어넘는 음반을 꼽기가 어렵다. 그렇게 자신의 경력을 눈부시게 쌓아가던 그에게 이십대 후반,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이 찾아온다. 삼십대 초반의 은퇴, 그 이후로 자클린은 첼로를 다시는 연주할 수 없었다. 육체적인 질병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녀의 외로움과 고통을 나눌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편이 있기는 했다.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21살 때 결혼했다. 유대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개종까지 했다. 야심에 찬 바렌보임은 자클린과 함께 엄청난 연주일정을 소화해가며 자신의 경력을 쌓아갔다. 자클린의 팬들 가운데에는 바렌보임의 자클린에 대한 그런 혹사가 발병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어쨌든 명성에 굶주린 늑대같은 이 남자는 자클린이 병으로 첼로를 하지 못하게 되자 그야말로 '헌신짝'처럼 버린다. 이혼을 요구했지만 자클린은 들어주지 않았고, 그래서 러시아 피아니스트와 살림을 차린 후 아들 둘까지 낳았다. 그러는 동안 클래식 음악계에서 바렌보임의 위상은 더 커져갔다. 자클린의 죽음 이후 어느 정도의 비난을 받기는 했어도, 그의 명성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영화 '힐러리와 재키(1998)'는 그런 자클린의 생애를 담았다. 이 영화가 나오자 바렌보임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이 기다려 줄 수 없는 거냐고 짜증 섞인 반응을 내놓았다. 이 영화도 진실을 온전히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언니 힐러리와 그 남편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 힐러리 남편을 자클린이 유혹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의 자클린을 유린한 것이라는 조카의 증언이 나중에 나왔다. 자클린은 이래저래 철저하게 고독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여성 예술가였다.


  영국의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짧았던 삶을 담은 다큐 '에이미(2015)'에도 그러한 비극이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눈부신 재능을 가진 싱어송라이터였던 에이미는 블레이크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나쁜 남자'의 전형적 표본 같은 블레이크는 에이미를 술과 약물의 세계로 안내한다. 사랑에 목말랐던 에이미는 야수같았던 남자에게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온전한 판단능력을 상실한 채 중독자의 길을 걷는다. 개기름 좔좔 흐르는 얼굴로 다큐의 인터뷰에 나온 뻔뻔한 블레이크를 보고 있노라면, 그 면상을 한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게 만든다. 블레이크는 에이미 사후에도 에이미의 사생활을 까발리며 돈벌이로 삼기도 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Rehab'을 들을 때마다, 저 노래 만들 시간에 재활원에 갔어야 했는데, 한탄을 하게 된다. 그걸 못하게 한 것은 에이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또한 블레이크와 비슷한 부류의, 에이미에게 '빨대' 꽂고 사는 더럽게도 한심한 인간이었다. 이 다큐는 그런 '포식자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고통받다가 결국은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한 여성 가수의 이야기인 셈이다.


  1979년에 나온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가 있다. 메릴 스트립, 더스틴 호프만이 나온 이 영화는 다른 의미로 '미투(Me Too)'운동에 소환되었다. 애슐리 저드의 폭로와 소송으로 시작된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는 헐리우드 일각에서 와인스틴과 친분관계가 있는 유력 인사들의 침묵과 방조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거기에 메릴 스트립도 언급되었는데, 와인스틴과 친했고 영화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여배우로서 그런 상황을 모를 리 없다고 맹공격을 받았다. 메릴 스트립은 그 사실을 완곡히 부인했다. 그 과정에서 메릴 스트립은 과거 일화를 털어놓으며 자신을 변호한다. 영화 촬영 당시 더스틴 호프만에게 뺨을 맞은 일화를 공개한 것이다.


  그 장면은 명백히 대본에 없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이혼 요구에 혼란과 고통에 빠진 남편의 육아, 법정 투쟁기를 다루고 있다. 메릴 스트립은 아내 역할을 맡았는데,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더스틴 호프만이 뺨을 때렸다고 한다. 감독과 영화 스텝들 모두가 놀랐고, 감독은 이 일 때문에 메릴 스트립이 고소를 하거나 촬영을 중단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범한 여배우는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영화를 끝까지 잘 찍었다. 더스틴 호프만에게 나중에 사과를 받기는 했지만, 메릴 스트립에게 이 사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스틴 호프만이 메릴 스트립의 뺨을 때린 데 대한 변명은 이러하다. 배역에 대한 사실감 있는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서였고, 자신은 당시 이혼 소송 중인 부인에 대한 악감정을 메릴에게 느꼈다는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영화의 식당 장면에서도 호프만의 폭력을 경험했는데, 식당 벽에다 유리잔을 내던져 버려서 공포감을 유발시켰다고 언급했다. 그 역시 대본에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크레이머 부인의 놀랍도록 차가운 적의로 나타난다. 나는 오래전에 그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메릴 스트립은 왜 저렇게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남편에게 무섭도록 적대적일까 의문을 가졌었다. 그 의문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풀렸다. 더스틴 호프만의 그런 '끔찍한' 행동은 영화에서 엄청난 적개심을 보여주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런 것이 없었어도 자신은 잘 해낼 수 있었다고 스트립은 회고했다. 


  메릴 스트립은 그 영화를 찍을 당시 경력이 별로 없는 완전 초짜 배우가 아니었다. 브로드웨이 연극계에서의 나름대로의 경력도 있었고, 연기력도 검증된 배우로서 신인이기는 했지만 뺨 맞을 정도로 무시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호프만은 아무렇지 않게 상대 여배우의 싸다구를 '날려버린다'. 아마도 '너 정도는 별거 아니니까, 앞으로 조심해서 잘 해라', 같은 기선 제압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식당 장면에서 물컵 내던진 일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메릴 스트립은 그 이야기를 2017년이 되어서야 공개했다. 자신 또한 헐리우드에서 영화 경력을 쌓아오는 동안 오만 말못할 부당함과 어려움을 겪었음을 미투에 힘입어 말하는 것이기도 했고, 후배 여배우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비난에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일화를 흘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일화를 공개하는 메릴 스트립의 속내는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너희들, 내가 어떻게 이 영화판에서 살아남았는지 알기나 하냐? 나 신인 시절엔 아무 이유없이 연기 잘하라며 뺨을 맞기도 했어. 오만 더러운 꼴 다 봤지. 너희들 겪은 어려움도 알겠는데, 내가 경험한 일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 같은 거지."


  생존자(survivor). 메릴 스트립은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살아남았고, 자신의 배우 경력도 지켜냈다. 대체 당신은 다른 후배 여배우들 안돕고 뭐했느냐고 메릴 스트립이 비난을 받는 것은 내 생각에 그다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런 비난을 하려면 와인스틴의 절친 타란티노에게도 공평히 주어져야 한다. 타란티노는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영화 작업을 와인스틴과 계속 이어왔다. 심지어 한때 연인 사이였던 미라 소르비노가 와인스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알려줬는데도, 타란티노는 그것을 무시했다. 모두가 그저 '왕의 부하들'이었을 뿐이다.


  이런 무수한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술을 만들어 내는 세계가 마치 정글과도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 속에는 무지막지한 포식자들이 있고, 그 아래에서 숨죽이며 겨우 생존을 이어가거나, 더러는 소리없이 사라지는 생명도 있다. 물론 뛰어난 생존력으로 포식자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공포와 위협의 순간들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그 정글을 자유롭게 탐험하며 포식자들과 공존하고 있다. 어쩌면 예술 작품이란, 결국 그 정글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투쟁들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남는 사람은 그 정글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연기로 보여줄 수 있다. 생존자가 승리자가 되는 순간이다. 

 


*위로부터 차례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힐러리와 재키', '에이미'

 포스터 출처: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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