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무슨 이야기 끝에 동생이 이런 핀잔을 주었다.
"에휴, 무슨 쌍팔년도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건 구식이라고, 구식!"
정확히 내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아주 옛날 사고방식으로 뭔가를 말했기 때문에 동생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구닥다리 같은, 시대에 한참이나 뒤떨어진 어떤 것. 그런데 쌍팔년도는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을 가리키는 건가? 그 말의 어원을 찾아보니 재미가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 말은 단기 4288년인 1955년을 의미하는 말로 '구식의 시대'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실제로 당시의 신문과 소설에 이 표현이 등장한다. 이제는 시대가 흘러서 지금의 세대에게 쌍팔년도는 1988년, 그러니까 시쳇말로 '꼰대'들의 후진 마인드와 가치를 대표하는 말이 된 듯하다.
내 기억 속의 1988년은, 온 나라가 서울 올림픽으로 들썩였던 해였다. 나에게는 아직도 그것이 최근년도의 일 같은데, 헤아려 보니 벌써 32년 전의 일이다. 기억의 왜곡된 보정이란 게 그렇다. 확실히 그 시절이 '구식'이라는 건 맞다.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 혁명이 오기 직전의 시대, 그러니까 아직은 아날로그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라디오 신청곡은 편지나 엽서로 신청해야 했고, 우체국 전보가 있었던 시절. 내가 이메일 계정을 처음으로 만든 시기가 1990년대 중반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 느려터진 넷스케이프, 천리안 PC 통신...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ness in Seattle, 1993)'은 그런 구식의,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가득찬 영화다. 가끔 케이블 영화 채널을 돌리다 보면 예전에 본 영화를 또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내게는 '로마의 휴일', '대부 1, 2', '쇼생크 탈출', 그리고 이 영화가 그러하다. 채널을 돌리려다가 뭔가 흠칫, 하고 멈춰서 그냥 보게 되는 영화들이다. 그거 다시 볼 시간에 새 영화를 보게 되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이 영화들은 뭔가 '마법'을 걸어버리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죄다 구닥다리 영화들이구먼.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다보면, 영화가 보여주는 그 시대의 정서들을 요즘 세대들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의 청춘이 지나온 시절이라서 나는 그 시대를 잘 알고 있고, 또 이제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절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뭐랄까, 저런 시절이 다 있었구나, 하는 생경한 느낌이 아닐까. 상처(喪妻)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샘에게는 어린 아들 조나가 있는데, 조나는 자신의 새엄마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화로 연결된 심야 라디오 프로에서 털어놓게 된다. 그 라디오 방송이 나가고 난 후에 샘에게는 '종이' 구혼 편지가 그야말로 폭탄처럼 쇄도한다. 이메일 따위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샘은 아들 조나가 구혼 편지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애니를 직접 만나러 비행기 타고 가출을 감행하자 아들을 찾기 위해 생고생을 하게 된다. 휴대폰이 없는 시대니까, 휴대폰 위치 추적은 꿈도 꿀 수 없다.
영화 속에서는 멕 라이언이 분한 애니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가 등장하는데, 그 영화는 무려 1957년에 만들어진 '러브 어페어(An Affair to Remember)'. 케리 그란트와 데보라 커가 주연을 맡은 그 영화는 말 그대로 구시대적 감성이 흘러내리는 로맨스 영화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떠난 여자가 어려움 끝에 마침내 사랑을 되찾는 그 영화를 보며 애니는 매번 눈물을 흘린다. 애니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다.
"그것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어요."
샘은 세상을 떠난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의 순간을 회고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애니는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샘이 그렇게 말하는 대목에서 'magic'이라고 똑같이 말하는데, 마치 종이에 겹쳐친 데칼코마니의 형상처럼 그 두사람이 운명처럼 연결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 '마법'과 '운명'이란 단어로 영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개연성을 아름다운 로맨스로 승화시킨다.
여러번 봐도 질리지 않게 만드는 데에는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의 연기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샘의 아들로 나온 조나 역의 아역 배우도 당당히 한 몫을 차지한다. 톰 행크스는 '터너와 후치(1989)'에서 보여주었던 코믹적인 면모를 이 영화에서도 잘 살려내는데, 나는 그가 연기 경력을 거듭할수록 드라마 장르에 무게 중심을 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모범생이 쓴 시험 답안지 같은 느낌이라, 차라리 이 영화를 비롯해 그의 초기작들에서 볼 수 있는 생동감이 더 보기 좋았다. 멕 라이언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인생작처럼 여겨지지만, 내게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두 배우의 연기 경력에서 모두에게 좋은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애니의 약혼자로 나온 배우 빌 풀먼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한때 헐리우드의 미남 배우의 계보를 이었던 그를 얼마전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해설자로 보게 되었다. 스미소니언 채널에서 만든 '요세미티 공원의 사계'라는 다큐였다. 이제는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모습은 내게는 꽤나 충격이었다. 나의 청춘을 지나온 영화 속 배우들은 이제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 나는 그 시절 배우들의 최근작들을 잘 안보는데, 한편으로는 그들의 나이든 모습을 보며 내 나이를 헤아리는 것이 괴롭고 귀찮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와 발렌타인 데이 때에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케이블 채널에서 잊지않고 틀어주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걸 다시 또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샘이 말했듯, 그냥 그 영화가 나에게 '마법'을 걸어둔 것이라고 하자. 김연아 선수가 2007년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연기한 쇼트 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는 당시 쇼트 점수 최고점을 갱신하며 역사를 썼었다. 내가 그 동영상을 얼마나 많이 돌려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볼 때마다 새로웠고, 김연아 선수의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좋아했었다. 그런 마법과도 같은, 매혹적인 순간들이 담긴 영상들이 있다.
쌍팔년도, 구식 시대의 빛나는 감성들로 가득찬 이 영화를 나는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것 같다. 영화 속의 애니는 오래전 로맨스 영화 '러브 어페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 대신, 지나간 내 청춘의 기억들과 그 시절을 돌아본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그땐 그랬었지."
한번쯤 뒤돌아 봐주길 바라는 청춘의 긴 그림자 위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